(고흥=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고흥군은 고흥반도와 주변의 230개 섬으로 이뤄졌다. 고흥의 23개 유인도 중 가장 잘 알려진 섬이라면 한국의 첫 우주센터가 들어선 나로도와 아프고 슬픈 역사의 상징인 소록도일터.
이 두 섬을 지나면 반도의 양쪽 끝에 여행자를 매혹하는 작고 아름다운 섬이 있다.
반도 끝 작고 아름다운 섬
비가 그친 12월의 아침, 마늘과 양파가 자라는 푸른 벌판을 달려 고흥반도의 남동쪽으로 향했다. 한겨울 수확을 마친 논에서 다시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나는 것도 남도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나로1대교를 건너 내나로도로, 나로2대교를 건너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외나로도에 들어섰다. 외나로도항에서 바로 코앞에 건너다보이는 애도, 쑥섬으로 건너갈 참이다.
질 좋은 쑥이 많이 나는 곳이라 '쑥 애'(艾) 자를 쓰지만, '사랑 애'(愛) 자로 잘못 생각하거나, '외도' 등으로 잘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 주민들은 쑥섬이라고 부른다고 강춘애 문화관광해설사는 설명했다.
이국적인 난대림과 바다 위 비밀 정원
쑥섬은 관광객을 실어나르던 배가 지난여름 폐선되면서 새 배를 건조하느라 12월 말까지 잠정적으로 탐방 운영이 중단된 상태였다. 마을 주민의 배를 빌려 타고 항을 출발한 지 3분 만에 쑥섬에 닿았다.
선착장 바닥 한쪽에 누군가 잡아 늘어놓았을 알록달록한 불가사리들이 먼저 반긴다. 마을 정자 근처에 모여 돌담 안 밭에서 자라는 김장 채소를 살펴보던 마을 주민들도 오랜만에 찾아온 외지인을 반갑게 맞아줬다.
개와 닭이 없는 이 섬마을의 골목을 누비는 건 고양이들이다. 고양이는 고양이인지라 반갑다고 다가가는 외지인을 쌩하고 외면했다. 조금은 우스꽝스럽지만 귀엽게 봐 주고 싶은 갈매기가 지붕에 올라앉아 있는 건물이 무인으로 운영되는 카페이자, 탐방로 입구다.
카페 뒷문으로 나가 '헐떡길'이라고 이름 붙인 고개를 짧고 굵게 넘으면 불쑥, 신비로운 난대원시림에 들어서 있다.
해병대 군복 같은 무늬를 가진 육박나무부터 오솔길 위를 가로지르며 거의 누워 자라는 수백 년 된 후박나무, 희귀수종인 푸조나무를 비롯해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남도에서만 볼 수 있는 늘푸른나무들이 우거져있다. 아침까지 내린 비에 촉촉하게 젖은 숲은 공간 이동이라도 한 듯 이국적이다.
태풍 매미(2003년)와 볼라벤(2012년)에 쓰러진 나무들 옆에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팻말이 놓여 있다. 난대림을 빠져나와 야생 무화과인 천선과 군락지, 야생 백합인 참나리 군락지, 소사나무와 돈나무 군락지를 지나 섬 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불쑥, 공간 이동을 한다.
이번에는 잘 가꾼 정원이다. 봄, 여름에 피는 꽃처럼 화려하거나 싱싱하지는 않지만, 이 겨울에도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꿋꿋이 피어있는 꽃들에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한여름 절정을 뽐냈을 수국 대신 천일홍, 란타나, 피튜니아, 팬지, 아게라툼 그리고 미처 이름을 알지 못하는 훨씬 더 많은 사랑스러운 꽃들이 회색빛으로 흐린 겨울 하늘 아래를 다채롭게 물들이고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기특한 꽃송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느라 시간이 훌쩍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남해를 향하니 멀리 소거문도, 손죽도, 초도가 나란히 보인다. 부드러운 바람에 파도 소리만 잔잔히 흐르는데 거문도에 다녀오는 여객선의 엔진 소리가 끼어들었다가 사라졌다.
300살 동백나무길과 돌담길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내려오는 길, 막 심은 어린 동백나무도 꽃봉오리를 머금었다. 그 아래서는 야생 갓이 커다랗게 쑥쑥 자랐는데 유채꽃을 닮은 노란 꽃도 피웠다.
일몰 명소라는 등대로 내려가면 바위와 소나무, 초록빛 바다가 어우러진 절경이 기다린다. 정원에서와는 달리 바람이 거세다. 면적이 0.3㎢에 불과한 이 작은 섬에서 발길을 옮길 때마다, 눈길을 돌릴 때마다 다른 세상을 마주한다.
대숲을 따라, 멋들어진 후박나무 아래를 지나, 동그랗고 네모난 쌍우물까지 내려오며 끝인가 싶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데 다시 시작이다. 200∼300년 된 동백나무들이 늘어선 길에서 다시 한번 탄성이 나온다. 2,3월이면 빨간 동백꽃 카펫이 깔릴 길이다. 일찍 핀 꽃도, 더 일찍 피었다가 이미 떨어져 버린 꽃도 있다.
동백길을 지나 마을로 나온다. 가슴께까지 올라오는 좁은 돌담길이 진짜 마지막이다. 바람이 거센 섬에서 사람과 바람이 함께 다니는 길이다. 1970년대에 300여명이던 주민은 20명 남짓으로 줄었고, 돌담 안 사람이 떠나고 남은 빈터는 이제 바람만 휘돌아 나간다.
묵어가고 싶은 작은 섬
500여 가지 수목이 자라고 400여 가지 꽃이 피고 지는 쑥섬은 전라남도의 제1호 민간정원이다. 201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본상인 누리상을 받았다.
나로도에서 나고 자란 교사 김상현(49)씨와 아내인 약사 고채훈(46)씨 부부가 10년째 가꾸고 있는 곳이다. 김 교사는 어릴 적 장애가 있는 어머니를 대신한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고, 자신이 받은 도움을 주변과 공동체에 되돌려주고 싶어했다.
그 마음에 공감해 준 아내와 함께 외가가 있던 쑥섬에서 주민이 떠난 땅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 2000년,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섬을 가꾸기 시작했다. 석공이었던 김 교사의 부친이 직접 돌을 쌓아 탐방길을 만들었다.
마을 주민들도 틈틈이 탐방길을 다니며 잡목을 치우고, 탐방을 마치고 내려온 관광객에게 직접 만든 쑥차, 해초 장아찌 등을 팔아 재미도 수입도 챙기며 공동체의 자산이 됐다.
지붕 없는 미술관, 연홍도
고흥반도 남서쪽 끝 녹동항에서 소록도를 지나 거금대교를 건너 거금도 신양 선착장에 내리니 바람이 거세다. '지붕 없는 미술관' 연홍도로 가는 길, 처음 마중 나온 배마저 미술관으로 가는 배답게 알록달록하다.
5분 만에 마을 선착장에 도착하면 이곳에서 많이 나는 대형 뿔소라와 자전거를 타고 굴렁쇠를 굴리며 개와 함께 달리는 아이들이 마을 입구 방파제를 장식하고 있다.
주민들의 옛날 사진을 모아놓은 '연홍 사진 박물관'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골목길이 미술관이다. 기왓장이나 장어통발로 만든 화분, 가리비와 전복, 소라 껍데기로 만든 꽃, 녹슨 석쇠 안에 납작한 돌과 유리 조각을 끼워 넣은 생선구이, 녹슨 부탄가스통으로 만든 양귀비꽃, 낚시 도구로 만든 낚시하는 사람 등 작가와 주민들이 주변의 버려진 재료들로 만든 작품들이 하나하나 재치있다.
가로등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조형물을 감상하면서 느릿느릿 돌아 나오면 연홍미술관이다. 초록색 칠이 벗겨지도록 낡은 책 읽는 소녀상과 이순신 장군상은 이곳이 한때 학교였음을 알려준다.
미술관 마당의 운치 있는 소나무 아래 벤치든, 갤러리 카페의 창가든 자리를 잡고 앉아 앞바다에 펼쳐진 '연홍도의 정원'을 즐겨보자. 완도군에 속한 금당도의 바위와 절벽이 절경을 이루는데, 정작 금당도 안으로 들어가서는 즐길 수 없는 풍경이다.
밭두렁길을 걸어 나오면 누런 강황밭 아래로 여전히 소가 쟁기질을 한다는 비탈밭에서 양파가 푸르게 자라고, 300년 넘게 마을을 지켜온 팽나무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넉넉히 시간을 두고 숲길, 둘레길을 따라 섬 양쪽 끝까지 천천히 걸어도 좋겠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