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수형인 "억울한 70년 한 풀어야"…한 달 후 재심 선고

입력 2018-12-19 08:00  

제주4·3수형인 "억울한 70년 한 풀어야"…한 달 후 재심 선고
법원, 군사재판 불법성 인정하고 내란죄 등 무죄 선고 가능성
수형인 대표성 인정되면 2천530명 피해자 유족, 줄소송 전망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제주4·3 생존 수형인이 제기한 재심사건의 최종 선고가 내년 1월 중순 이뤄진다.
'4·3' 당시인 70여년 전 군사재판에 대한 이례적 재심이기 때문에 의미가 커 벌써 관심이 쏠린다.
현우룡(93) 씨 등 18명은 지난해 4월 제주지법에 불법 군사재판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현씨 등은 '4·3'이 소용돌이치던 1948∼1949년 계엄령과 국방경비법에 의해 이뤄진 군사재판 자체가 위법했으며 불법 구금과 고문 등으로 인해 모든 것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제주지법은 지난 9월 재심을 개시, 현재까지 4개월간 심리를 진행했다. 내년 1월 17일에는 최종 선고를 할 예정이다.
법원은 현씨 등이 재판을 받은 공소장과 판결문이 남아 있지 않으나 직접 경험을 진술받는 방식으로 보충해 재심을 진행해 왔다.
청구인 김평국(88·여)씨는 "노환 때문에 다 죽다가도 '내일 재판이 열린다'는 말만 들으면 다시 일어날 기운이 생긴다"며 "평생을 억눌러온 억울한 누명을 벗고 눈을 감겠다"고 말했다.



◇ 검찰도 느낀 '역사의 아픔'
지난 17일 제주지검 공판검사는 이 사건 결심공판에서 숙연한 표정으로 최종 의견을 진술했다.
그는 현씨 등 청구인 17명(1명 불참)을 바라보며 "전에 몰랐던 4·3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도민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은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알고 배웠던 것과는 또 다른 진실의 일면을 깨달았다"고 했다.
또 "몸과 마음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버텨낸 여기 모든 분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3으로 당시 제주도민 10분의 1인 2만5천여명 이상이 희생되고 제주 전역의 300여 마을 2만여 가구가 소실됐다.
산간 마을에서 집단 학살과 방화가 이뤄졌고 목숨을 부지한 이들도 이념의 무게에 눌려 수십 년 세월 동안 말 못 할 고통 속에서 숨죽여 살아왔다.
검찰은 청구인 대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공소기각 판결'을 선고할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4·3 당시 공소 제기(기소) 절차가 법률의 규정을 위반해 무효일 때(형사소송법 제327조 제2호)에 해당한다고 봤다.



검사는 일반적으로 법원이 피의자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릴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재판을 요청하는 기소를 한다. 다른 말로는 공소 제기라고도 한다.
재심 사건에서 검사의 공소기각 요구는 이례적인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
4·3 당시 군사재판이 별다른 근거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져 무효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검찰의 공소기각 구형에 대해 확대해석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 상황에서 1948∼1949년 당시 공소사실을 알 수 없는 것일 뿐, 현씨 등에게 죄가 없다는 무죄를 구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사법부, 무죄 판결 내리나
4·3 생존 수형인의 변호를 맡은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검찰이 변경 제출한 공소장을 재판부가 공소사실을 보충한 것으로 판단했다"면서 재판부가 최종 선고에서 검찰이 요구한 공소기각보다는 무죄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했다.
공소기각 판결은 사실상 무죄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하나 유·무죄를 따지는 것보다 기소 자체만 염두에 둔 것이다.
4·3 당시 군법회의가 불법적으로 진행됐다는 점 외에도 수형인들은 본인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점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재판부는 지난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제출한 변경 공소장을 원래의 공소사실을 복원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청구인들이 제기가 법원에서 받아들여 져 재심이 이뤄졌다는 자체의 의미도 있다.
이번 재심으로 인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같은 사건의 경우 청구인 모두가 대표성을 띠게 됐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4·3수형인은 2천530명에 이른다. 대부분 행방불명되거나 옥고로 숨졌다.
재심 개시 결정으로 18명 외 생존한 수형인 10여명과 숨진 수형인의 유족도 재심 청구 권한이 발생하게 됐다.
만일 무죄가 선고된다면 다른 수형 피해자들도 무죄를 선고받을 가능성이 크다.
공소기각이나 무죄 선고로 사법부가 4·3 군사재판이 불법이었음을 인정하는 최초의 판단이라는 의미도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등이 당시 군사재판이 불법임을 수차례 확인했으나 이는 행정기관의 판단에 그친 것이다.
군사재판에서 영장주의를 위배한 불법 구금과 불법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사법부가 확인해 주는 셈이다.
재심 여부를 다투는 과정에서는 18명에 대한 밀도 있는 조사가 이뤄지는 계기가 돼 추가적인 증거도 속속 나타났다.
군사재판에 따른 재판 기록조차 없으나 18명 모두 전과 기록에 내란죄와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기재돼 있다.
지난 5월에는 청구인 중 오영종(88) ·현우룡씨에 대한 '군집행지휘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1949년 7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군집행지휘서는 4·3 당시 제주군 책임자로 진압 작전을 주도한 함병선 수도경비사령부 보병 제2연대장(육군대령)이 대구형무소장에게 형 집행을 요청한 공문서다.



◇ 제주4·3 수형인은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의 진압 등 소요사태 와중에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적게는 1만4천,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잠정 보고됐다.
수많은 유형의 4·3 피해자 가운데 4·3 수형인은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서대문형무소 등 전국 형무소로 끌려가 수감된 이들을 말한다.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이 수형인명부를 발견하면서 그 인원이 2천5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수형인은 행방불명 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기도 했다. 살아남은 생존자로 신고된 인원은 33명에 불과하다.
생존자들도 육체적 정신적 후유장해를 겪다가 상당수가 생을 마감했다. '연좌제'로 인해 자녀가 공직 취업에 제한되는 피해도 봤다.


kos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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