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길어 올린 '샘', 한국 왔다…뒤샹 회고전 개막(종합)

입력 2018-12-20 16:14  

현대미술 길어 올린 '샘', 한국 왔다…뒤샹 회고전 개막(종합)
예술 재정의한 마르셀 뒤샹 작품 150여점 국립현대미술관서 전시
최다 소장처 필라델피아미술관 공동기획…'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도 나와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MMCA) 지하 1층 중앙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주시하는 유리장 속 물건은 다름 아닌 남성용 소변기.
"20세기에 등장한 것 중 가장 위대한 영향력을 미친 예술품"(윌 곰퍼츠 '발칙한 현대미술사')인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조각 '샘'(Fontaine)이다.
1917년 4월 미국 뉴욕에서 대규모 전시를 준비하던 독립미술가협회 인사들은 출품작 봉투를 열어 보고서는 할 말을 잊었다. 소변기 하나가 뒤집힌 채 자신 또한 '작품'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손을 댄 흔적이라고는 검정 물감으로 쓴 'R.MUTT 1917'라는 서명이 전부였다.
출품비만 내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홍보한 진보적 성향의 협회도 이 '작품'을 포용하지 못했다. 출품 허가를 얻지 못한 소변기는 대중 앞에 한 번도 공개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프랑스에서 막 미국으로 건너온 청년은 장난처럼 보이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현대미술사를 새롭게 썼다. '샘'은 예술이란 작가가 직접 손으로 그리거나 만드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을 무너뜨렸다. 대량생산된 기성품일지라도 작가의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더함으로써 미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술을 재정의했다.
"일반적인 상점에서 산 기능적인 물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미술의 맥락 안에 들었다."(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미술관 현대미술 큐레이터) 작가는 이러한 방식을 '레디메이드'라고 이름 붙였다.
'샘'이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이 함께 기획해 22일부터 서울관 1, 2전시실에서 선보이는 '마르셀 뒤샹' 전을 위해서다.
1917년 원본은 사라졌지만, 명성을 얻은 작가는 1950∼1960년대 17점의 '샘'을 재연했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소장한 '샘'은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50년 뉴욕 전시를 위해 파리 벼룩시장에서 산 소변기에 작가가 서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샘'뿐 아니라 뒤샹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린 문제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1912) 등 필라델피아 소장품 위주로 150여점이 나왔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뒤샹 작품을 소장한다. 작품이 한 기관에 모이길 원한 뒤샹이 후원자 루이즈·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도움으로 이곳에 다수 작품을 기증한 덕분이다.
티머시 럽 필라델피아미술관장은 20일 기자간담회에서 "뒤샹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어렵다"라면서 "그가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에 준 영향도 크지만, 그 이후가 더 크다"고 밝혔다.
뒤샹 사상이 당대뿐 아니라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개념주의 등 이후 다양한 미술운동에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뒤샹 삶을 따라가며 작업 변화를 감상하도록 짰다.
1부는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 등 당시 프랑스 화풍을 익히며 제작한 그림과 드로잉을 선보인다. '샘'의 작가가 그린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퇴짜'를 맞고 미국 뉴욕에서 전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출세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도 전시됐다. 비스듬히 누운 일반적인 누드상이 아니라, 나신 움직임을 부각하고 성별은 지웠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2부는 '샘'을 비롯한 '레디메이드' 작품들로 구성됐다. 실을 캔버스에 꿰매 그린 '초콜릿 분쇄기', 우연성을 강조한 '통풍 피스톤',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이랄 수 있는 '자전거 바퀴' 등이 전시됐다.



3부에는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내세워 정체성에 물음을 던진 작업과 미술과 공학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을 한 '로토릴리프'(광학선반) 등이 나왔다.
이지회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미 젠더 연구가 시작되기 반세기 전에 뒤샹은 남성과 여성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라면서 "그는 상반된 것을 조화롭게 만들고 위계나 구분을 전복시켰다"고 강조했다.
뒤샹 아카이브인 4부에서는 마지막 작업으로 알려진 '에탕 도네'를 제작하며 남긴 연구 작품도 공개된다. 필라델피아미술관에 영구 설치된 조각-건축물인 '에탕 도네'는 이동이 어려운 만큼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로 구현된다.
뒤샹의 삶과 예술에 영향을 준 사진가 만 레이,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 초현실주의 작가 앙드레 브르통 등과 생전에 교감하고 협업한 모습도 만난다.
전시는 내년 4월 7일까지.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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