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안전기준 준수가 비용 줄이는 길" 인식…사전 엄격점검-사후 강력처벌 '이중장치'
미국, 노동당국에 강력한 단속 권한…일본 '안전 우량기업' 공표
(워싱턴·런던·도쿄=연합뉴스) 김정선 임주영 박대한 특파원 = 미국,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산업현장에서 안전사고를 줄이기 위해 엄격한 사전 점검과 강력한 사후 처벌이라는 정책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런 '이중장치'를 통해 사고를 방지해 사회적 손실을 줄이고 기업에는 자발적으로 규정을 지키는 분위기를 유도한다. 안전을 단순히 '비용'이나 '불필요한 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한국에서 2016년 구의역 사고를 계기로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이 쏟아졌다가 재계의 반대 등으로 2년간 개정안이 표류했던 것처럼 이들 선진국에서도 대규모 산업재해와 사망사고를 계기로 산업안전관리 법규를 제정했다가 기업의 반발을 샀던 전례가 있다.
◇ 美, 막강 권한의 OSHA…겹겹의 제재금으로 안전사고 사전예방
미국은 산업현장의 안전·위생에 관해 전통적으로 주(州) 단위에서 법률로 규제해 왔다. 연방 차원은 1936년 월시-힐리법을 계기로 작업장 안전과 근로시간 등을 감독할 기반이 마련됐다.
그러나 산업 안전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다가 1950년대 들어 큰 산업재해가 발생하면서 연방 규정에 따른 통일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에서는 1970년 산업 안전과 위생에 관한 포괄적 연방 법률인 '직업안정위생법'이 제정되면서 관리·감독이 체계화됐다.
이 법은 적용 대상 사용자를 '근로자를 사용해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업에 종사하는 자'로 넓게 정의한다. 또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사망 또는 중대한 위해를 가져올 개연성이 없는 환경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이 법의 특징은 행정부가 주도하는 법률이라는 점이다. 기준 제정부터 점검, 위반 통과와 제재금 부과까지 노동 당국의 역할이 매우 크다.
노동장관은 안전위생에 관한 기준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실무는 노동부 직업안전위생관리국(OSHA)이 맡는다.
미국에서도 1980년대까지는 과잉 규제를 비판하며 비용을 중시하는 산업계를 배려해 단속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이후 안전이 중시돼 기준을 강화하고 단속 또한 엄격해졌다.
OSHA의 권한은 막강하다. 작업장에 불시 감독을 나가 점검한 뒤 그 결과에 따라 제재금을 부과한다. 규정을 위반하면 건당 1만2천934달러(약 1천454만여원)가 부과된다. 몇 건만 적발돼도 거액을 치러야 한다. 지적 사항을 개선하지 않으면 매일 추가 벌금이 가해진다.
행정부뿐만 아니라 법원도 기업에 무거운 책임을 지운다. 사업주가 기준을 어겨 소송을 당하면 벌금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은 겹겹의 부담을 떠안는 셈이다.
통상 어떤 행위가 불법임을 알면서도 저지르거나 과실로 범한 경우 법적 책임을 지지만, 일부 안전사고에는 '무과실 책임'을 묻는다. 위법성에 대한 인식, 즉 고의·과실과 관계없이 상황 발생 자체에 책임을 지게 된다. 환경, 의약 분야 등이 대표적이다.
노동 당국의 한 관계자는 "미국은 사업주에 대한 행정부의 사전적 예방 조처와 제재가 매우 강하다"며 "법원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안전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오히려 비용을 줄이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 英, '영국판 세월호 사고' 계기 산업재해에 기업·정부도 처벌
영국은 유럽 내에서도 산업 안전과 관련해 선진국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보건안전청(HSE) 집계에 따르면 2017∼2018년 1년 동안 직장 등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이는 144명으로 집계됐다.
2007∼2008년에만 해도 연간 사망자가 233명에 달했지만, 이후 꾸준히 줄어 2016∼2017년에는 135명까지 감소했다. 2013∼2014년부터 4년간 업무 현장 등에서 숨진 노동자는 연평균 141명이다.
유럽연합(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근로자 10만명당 작업장 내 치명상 발생률은 2015년 기준 영국이 0.51명으로 핀란드를 빼면 가장 낮았다.
독일 0.74명, 이탈리아 0.82명, 폴란드 1.06명 등으로 EU 평균(1.29명)에 비해 낮았다. 스페인은 1.91명이었고, 프랑스는 3.62명으로 EU 회원국 중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가장 높았다.
영국이 처음부터 산업 안전 선진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1987년 '세월호 사건'과 흡사한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 호' 좌초사건이 발생했다.
벨기에 앞바다에서 승객과 선원 450여명을 태운 영국 해운사 소유의 배가 선원 실수로 차량을 싣는 문을 제대로 닫지 않고 출항했다가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좌초됐다.
이 사고로 193명이 숨졌지만, 법원은 기업에 책임을 묻지 않고 선원만 처벌했다.
이후에도 비슷한 사고에서 기업과 경영진의 책임을 외면한 판결이 이어지자 영국은 사회적 논의 끝에 2007년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을 제정했다.
이듬해 4월 6일부터 시행된 이 법은 산업현장에서 심각한 관리상 실책이나 부주의 등으로 사망사고가 발생할 경우 기업이나 정부 기관에 책임을 묻을 수 있도록 했다.
심각한 위반 시 상한선 없는 벌금 부과가 가능하며 유죄가 인정되면 관련 내용과 벌금 부과 사실을 공표해야 한다.
2011년 기업살인법을 적용한 첫 유죄 판결이 나온 뒤 주요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이 법의 적용을 검토하는 경우가 많다.
런던 경찰청은 작년 6월 24층짜리 공공 임대아파트 그렌펠타워에서 화재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과 관련해 소유주인 켄싱턴·첼시 왕립자치구, 건물 관리를 맡은 켄싱턴앤드첼시임대관리협회(KCTMA)에 과실치사 혐의 적용을 검토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기업 안전의무 강화를 강제한 법 시행과 함께 산업 안전을 위한 대규모 투자와 예방 노력이 더해지면서 이후 산재 피해가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 日, 장시간 노동 건강안전에 초점…비정규직 수당 차별은 위법 판결
일본에서 노동 안전 내용을 담은 법률로는 '노동안전위생법'을 꼽을 수 있다.
이 법은 노동재해 방지 기준을 확립하고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업자에게 노동재해 방지 책무를, 노동자에게 관련 조치에 협력할 것을 강조하며 일정 규모 사업장에 총괄 안전위생 관리자, 안전관리자, 안전위생추진자 등을 선임하도록 한다. 노동자의 위험 또는 건강상 장애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도 담았다.
후생노동성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에서 노동재해로 인한 사상자 수는 총 12만460명으로 전년보다 2.2% 증가했다. 사망자 수는 978명으로 5.4% 늘었다.
일본에선 최근 대형 노동재해 사고보다는 장시간 노동 문제가 부각돼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2015년 초과근무에 시달리던 대기업 '덴쓰'(電通)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高橋まつり·사망 당시 만 24세)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해 파문이 일었다.
올해 6월에는 노동개혁 법안인 '일하는 방식 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시간외근무 시간의 상한을 한 달에 45시간, 1년에 360시간으로 정하고 이를 어길시 사용자에 징역과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같은 노동을 할 경우 같은 수준 임금을 주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천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최고재판소에선 같은 달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수당을 차별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판결이 처음 나왔다.
일본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지난해 2천133만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일본 정부는 노동안전·위생에 관해 적극적인 기업을 공표하는 '안전위생 우량기업 공표제도'를 2015년 6월부터 운영 중이다. 과거 3년간 중대한 법률 위반이 없고 노동자의 건강 증진과 정신건강 대책, 과중한 노동방지, 안전관리 등에서 적극적인 기업이 그 대상으로, 현재까지 36개사가 인정받았다.
후생노동성 산하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의 노사관계 부총괄 연구원인 오학수 박사는 "우리나라 노동 현장에선 속도를 중시하고 절차를 간과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며 "과도하게 인건비를 억제하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것은 노동재해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박사는 "일하는 사람의 건강을 고려하고 안전과 안심을 우선시한다는 가치에 부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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