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세상을 바꾸다] ①남성·권위주의 사회의 종언

입력 2018-12-24 07:01  

[미투, 세상을 바꾸다] ①남성·권위주의 사회의 종언
검찰 내 성폭력 폭로로 촉발…각계 거물급 인사 줄줄이 '고개'
직장·학교 등 일상 성폭력도 고발…시민 '위드유'로 연대
"억압적 질서·권위 옅어지고 민주주의 기여…법제도 마련은 아직 요원"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한 여성이 자기 삶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가 1968년 발표한 시 '케테 콜비츠'에 쓴 이 시구(詩句)는 50년이 지난 2018년 한국 사회에서 과장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진리를 담은 경구(警句)였음이 입증됐다.
올해 1월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을 폭로하면서 국내에 촉발한 '미투(#metoo·나도 말한다)' 운동은,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지면서 이 땅 전반에 뿌리 깊었던 성폭력을 불태우며 남성중심주의라는 밑바닥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미투가 성폭력을 고발하는 여성권 운동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렸던 남성적 권위주의에 종언을 고하는 한편, 개인주의가 심해지던 한국 사회에 '연대'의 힘을 다시금 일깨웠다고 말한다.



"그들 앞에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결코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2010년 10월 30일 한 장례식장에서 법무부 장관을 수행하고 온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인 안태근(추후 검찰국장)에게 강제추행을 당했습니다."
올해 1월 29일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망에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어투로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서 검사는 방송에 직접 출연해 피해 당시 정황을 차분하고도 막힘 없이 설명했다.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007년 미국의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제안하고 2017년 미국에서 본격화한 미투는 서 검사의 폭로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도 각계각층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다.
미투는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폭로 운동이라는 경험을 먼저 한 문화예술계에서 먼저 퍼져 나갔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됐던 고은 시인이 오래전부터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폭로가 나온 데 이어, 연극계 대부로 불렸던 이윤택 연출가가 상습 성폭력 사실이 밝혀져 경찰에 구속됐다.
조재현, 오달수, 김생민 등 유명 배우와 방송인도 미투의 조명 아래서는 자신들의 과거 부적절한 행위를 숨기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미투가 지목한 거물 인사의 정점은 정치인이었다. 차기 대권 주자로까지 거명됐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직위를 잃고 법정에 섰다. 정봉주 전 의원은 미투 해명 과정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미투의 화살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인사들을 전방위적으로 꿰뚫는 사이에, 평범한 시민들도 하나둘 '#metoo' 해시태그를 달고 과거의 성폭력 피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친구, 선후배, 교사, 교수, 직장 상사, 동료, 연인, 가족, 친척 등 실로 다양한 범주의 가해자에게 성폭력을 당했던 수많은 피해자가 익명일지라도 자신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으며 앞선 미투에 연대했다.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용기에 다른 시민들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댓글을 달며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 운동으로 지지를 보냈다.
서 검사가 방송에 출연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 나왔다"라고 말한 것처럼, 미투 운동의 첫 번째 목표가 성폭력 가해자의 처벌이 아니라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한 '연대'였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대학교수나 초중고 교사를 향한 미투 폭로는 가해자의 징계나 처벌로 이어지기도 했다. 초중고의 '스쿨 미투'는 여름방학 때 잦아드는 듯 보였다가 2학기가 시작된 후 최근까지도 계속되면서 학교 공간의 폐쇄성을 반증하고 있다.
거물급 인사를 향한 미투가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했던 '권력형 성폭력'의 문제를 일깨웠다면, 일반 시민들의 익명 미투는 직장·학교 등 우리 주변의 공간에도 구석구석 '젠더 권력'에 의한 성폭력·성차별이 만연했음을 고발했다.



학자들은 미투가 그간 한국 사회에 퍼져있던 성폭력·성차별 문제의 고름을 터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를 뒤집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권김현영 여성학자는 "대학생들을 만나보면 예술대 등에 있었던 군기나 기합 문화가 미투 이후로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면서 "위계질서·권위주의 등 잘못된 형태의 폭력이 퍼져있던 한국 사회의 일상이 미투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논의됐던 민주주의가 지도자를 어떻게 뽑느냐 등 정치 제도에 관한 것이었다면, 미투는 '우리가 모두 동등한 인간이다'라는 감각을 경험하게 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신장하도록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 전반의 성차별적 위계질서 구조에 변화를 가져온 것에 비교하면, 오히려 미투가 애초에 고발한 성폭력 문제를 뿌리 뽑을 법·제도는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은 여전히 피해자의 항거 여부에 맞춰져 있고, 조직문화 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처벌할 법안도 신설되지 않았다"면서 "미투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도 폐지되지 않았고, 성평등 관련 인력·예산 배정도 유의미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윤김 교수는 "미투는 신자유주의 도래 이후 개인주의가 강해지고 역설적으로 위계·조직 문화도 굳어졌던 한국 사회에 진정한 '연대'의 힘을 일깨웠다"면서 "미투로 한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거점을 마련한 여성들은 내년에도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hy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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