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철군 후 아프간서도 병력 감축 등 중동서 '발 빼기' 수순 관측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미칠 영향도 관심…재선 노림수 분석도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 "미국이 세계의 경찰 역할을 계속할 수 없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 세밑 지구촌의 외교안보지형에 심상찮은 파장을 드리우고 있다.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타고 세계 곳곳의 분쟁에 개입하며 국제질서의 수호자임을 자처해왔던 미국의 역할이 중대한 변곡점에 올라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가 아니냐는 해석이 이어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26일(이라크 현지시간) 이라크 알아사드의 미군 공군기지를 깜짝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은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일 수는 없다"며 "모든 짐을 미국이 져야 하는 상황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의 엄청난 군을 이용하는 국가들에 더 이상 이용당하기를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며 "그들은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있지만 이제는 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세계의 호구(suckers)가 아니다. 우리는 더는 호구가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호구로 보지 않을 것"이라며 격정적인 표현까지 동원해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의 경찰' 역할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 적극적 개입주의를 표방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맞섰던 그는 고립주의로 회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이는 미국 유권자들로부터 일정한 호응을 끌어냈다.
1947년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이 공산주의의 확산 저지를 위해 동맹국을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제창한 이후 줄곧 크고 작은 지구촌 분쟁에 개입해왔으나, 다양한 대내외적 부작용으로 인해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발언이 단순히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미국의 적극적 개입주의 노선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실행모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시리아에서 2천600여명 규모의 미군을 철수시키는 방안을 확정한 데 이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며 탈레반과 싸우고 있는 미군 병력 철수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언론은 현재 아프간 주둔 병력 1만4천 명 중 절반을 철수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세계의 경찰 역할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노선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짝을 이루는 일이기도 하다. 경제 분야의 보호무역주의가 그렇듯 미국의 실리·실익 극대화를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겠다는 고립주의 노선이다.
여기에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동맹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동맹이더라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관계 재조정'도 불사한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기조다.
미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의 경찰 중단 선언이 중동 지역에서의 '발 빼기'를 가속화할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미국이 시리아 전면 철군에 이어 2001년 9·11 테러 이후 17년 넘게 지속되며 교착 상태에 빠진 아프간 전선에서도 서서히 발을 뺌으로써 중동 전략을 사실상 전면 재검토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미국과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벌이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 같은 정책 기조가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큰 관심사다. 미국은 한국 측이 더 많이 부담하기를 요구하면서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관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이라크 현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부자 나라들은 그들 국방의 막대한 부분을 미국이 지불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부자 나라들'의 방위비 분담 확대를 거듭 요구한 것도 간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나는 중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외교안보 노선이 중동을 넘어 다른 지역의 부자 나라들도 겨냥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전날에도 방위비 분담금 문제에 대해 "우리가 불이익을 보면서 부자 나라들에 보조금을 지급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기적으로는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철수 등 인화성 큰 이슈로도 불씨가 옮겨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미군의 국외 주둔은 상당 부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전략적 결정이라는 점에서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이 한국을 포함한 범 세계적인 철군 명령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이라크 주둔 병력의 철수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이란과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 잔당에 대한 견제 역할을 계속하겠다고 강조한 것이 그 근거다.
트럼프 대통령은 장병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IS의 부활을 예방하고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이라크에서는 미군 병력을 유지한다"며 자국 이익에 부합할 경우에는 얼마든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이어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따라서 '부자 나라'를 겨냥한 트럼프 대통령의 거듭된 압박성 발언은 철수 또는 감축보다는 방위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카드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 내에서 사면초가에 몰렸다는 점에서 이번 행보에는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AFP 통신은 "(이번 방문은) 정부의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에 따른 혼란, 트럼프 대통령의 탈세 의혹이나 러시아와의 연계 의혹 등에 대한 수사 등 국내 정치적 문제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게 해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좀 더 거시적으로는 2020년 재선을 겨냥해 핵심 지지층의 마음을 사기 위한 정치적 승부수의 하나가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앞서 CNN은 국경장벽 예산 확보를 명분으로 셧다운을 강행하고, 돌발적으로 시리아 전면 철수를 결정한 일 등을 두고 "트럼프는 가장 헌신적인 지지층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울러 이번 선언의 배경에는 결국 '돈 문제'가 자리한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그동안 국제법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경찰'이라는 개념 하에 1993년 소말리아 사태 개입, 알카에다·탈레반 등을 겨냥한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수행하면서 국제 정치 질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는 막대한 국방 예산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재정 적자에 결국 발목을 잡히면서 미국은 2012년 국방전략을 대폭 수정하고 22년 만에 '두 개의 전쟁' 전략을 폐지했다. 전 세계 2곳의 분쟁 지역에 지상군을 파견해 동시에 승리한다는 이 전략은 냉전 후 미 국방 정책의 줄기였지만 이를 버린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2013년 시리아 사태를 군사 수단이 아닌 외교로 풀겠다며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아니라"라고 밝힌 바 있다.
2016년 대선 때부터 세계의 경찰 역할론에 의문을 제기한 트럼프 대통령 역시 당시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우리는 세계의 경찰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전 세계의 나라들을 보호할 수 없다"고 말했다.
sisyph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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