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 ②동독의 '봉' 서독, 대가는 시민편익…경제의존도 키워
'통일열차'에서 '평화열차'로 갈아타…평화·교류확대 편익
신동방정책 계승 보수정권, 실리적 대가 챙겨…개혁씨앗도 뿌려
서독인, 통일 염원은 컸지만 현실적 기대치는 낮아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봅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앞으로 1년간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갑니다.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을 주제로 한 첫 시리즈로 6개의 기사를 6일간 연재 중입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① 장벽만큼 높던 '서서갈등'의 해빙…東西공존 아우토반 닦아
② 동독의 '봉' 서독, 대가는 시민편익…경제의존도 키워 ←←
③ 서서갈등도 '상호성·인권'…불신임투표·위헌소송까지
④ 박명림 "北만큼 野대화 중시필요…비핵-북미수교 교환해야"
⑤ 前전독일연구소장 데틀레프 퀸…"南시민의 北방문 자유 인정 필요"
⑥ 30년전 서독청년…"장벽 무너질 때 금맥 발견한 듯"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독일 통일 이전, 서독은 도로ㆍ철도 건설 지원 및 대규모 차관뿐만 아니라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사실상 동독의 '봉'이었다.
동독은 서독과 서베를린을 잇는 제한속도 시속 100㎞의 고속도로에서 출구 도로의 속도를 절반인 50㎞로 낮췄다.
상당수의 서독인이 순간적인 감속에 어려움을 겪을 때 어김없이 숨어있던 동독 경찰관들이 나타나 벌금 딱지를 건넸다. 외화 부족에 시달리던 동독 정부 측의 '서글픈 꼼수'였다.
1986년 1월부터 5월까지 서독인들이 교통위반으로 부과받은 벌금 건수는 6만2천 건에 달했다.
같은 해 8월 29일자 주간지 디 차이트가 '동독, 값비싼 규칙 위반'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한 내용이다.
또,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인들은 하루에 25마르크를 동독 마르크로 환전해야 했는데, 쓰고 남은 금액을 다시 서독으로 갖고 나오지 못했다. 더구나 동독 마르크의 실제 가치는 서독 마르크의 3분의 1에 불과했는데, 환전은 1대 1로 이뤄졌다. 동서독 관계에서 이런 식의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동독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동독 인권 문제는 서독 내 갈등의 요소였지만, 서독 시민들은 슬기롭게 풀어나가며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진행했다.
하지만 서독인들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감수한 것도 아니었다.
신동방정책에 따른 동독과의 교류·협력 속에서 직·간접적인 '편익'을 챙겼다.
특히 동독에 대한 지원의 이면에는 서독 나름의 치밀한 레버리지(지렛대) 전략이 있었다.
서독은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의 과정에서 천문학적으로 '퍼주기'를 했다. 파산 위기의 동독에 차관을 제공해 동독 정권의 생명을 연장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서독인들은 평화를 얻었다. 분단의 고착화로 인한 민족의 이질감이 커지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동서독인의 인적 교류확대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커졌다. 평화가 찾아오자 경제적으로도 더욱 안정감을 갖게 됐다.
신동방정책을 밀어붙인 진보성향의 사회민주당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자유민주당을 소수 파트너로 삼아 정권을 잡았다.
이후 보수성향의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 내 강경파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서독인들에게 동독과의 교류·협력, 평화는 이미 삶 속의 일부였다.
나아가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은 정권을 다시 찾은 이후 경제적 지원에 대한 대가로 동독 정부로부터 인권 문제 등에서 진보정권보다 더 대가성 조치를 얻어내며 실리를 챙겼다.
그뿐만 아니라 동독체제가 서독 정부의 지원 없이는 경제적으로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의 의존성을 끌어내는 전략적인 성공을 이어갔다.
이번 기사에서는 당시 여론조사 결과와 언론 기사, 동서독 간 협상결과 등을 토대로, 서독 시민의 관점에서 동독과의 교류·협력에 대한 대가로 추구한 편익을 알아본다.
◇ 서독 시민, 서베를린으로 통행편리·동독으로 여행권리 확대 얻어
독일의 여론조사기관인 '알렌스바흐'는 지난 1972년 2월 성인남녀 2천 명을 대상으로 '동구권 국가들과의 외교에서 포기해서는 안 되는 사항'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다.
앞서 1970년 서독은 소련, 폴란드와 각각 모스크바 조약과 바르샤바 조약을 맺어 외교를 정상화했고, 이를 원동력으로 동독과 협상을 진행해 1972년 12월에는 본격적인 동서독 교류·협력의 근간이 된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서베를린 거주자들이 여타 서독 국민들과 똑같이 베를린으로의 여행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항목에 응답자의 88%가 '꼭 해야 한다'고 답했다.
'베를린 장벽과 동독 경계에서 탈주민에 대한 사격이 중지돼야 한다'는 항목에 85%가 '꼭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동독인이 서독으로의 여행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항목에도 83%가 '꼭 해야 한다'고 반응했다.
서독 정부의 신동방정책을 지원하는 여론이 다수인 상황에서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편익을 주장한 것이다.
서독 정부는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1971년 9월에는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2차 세계대전 전승국 4대국이 '4대국 협정'을 체결하도록 했다.
서독과 서베를린 간의 인적·물적 이동과 서베를린과 동독지역 간 인적 교류확대 등을 이전보다 원활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실제 기본조약 체결 후 동서독 관계가 진전되면서 서독 시민들은 동독으로 여행할 기회가 많아졌다. 1984년 한해에만 동독을 방문한 서독인은 630만 명, 서독을 방문한 동독인은 155만명에 이르렀다.
서독 정부 산하의 전(全)독일문제연구소장을 지낸 데틀레프 퀸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동서독 교류·협력을 통해 서독과 서베를린 간 고속도로를 정비하면 서독 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게 돼 서독이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논리로 정부 측이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이런 논리적 적용이 가능한 것 아니냐"라며 "북한과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면 그 편익은 러시아 및 중국과 교역을 하는 한국 기업이 가져가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친(親)기업성향의 소수당인 자유민주당이 1969년 총선에서 제1정당인 기민·기사 연합과 결별하고 사민당과 연정을 꾸린 데에도 당시 진보적인 사회적 흐름과 함께 동서독 경제협력에 대한 실리적인 시각이 반영돼 있었다.
독일 마부르크대 정치학 박사인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남북 간의 교류·접촉이 확대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철도가 연결되면 유라시아가 우리에게 들어온다"면서 "지금은 교류·접촉에 대한 실리가 관념적이지만 반복적인 접촉이 이뤄지면 실제적으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면 '퍼주기' 속에서도 대가를 얻어야 한다는 여론도 상당했다.
1970년대 중반 서독과 서베를린을 잇는 고속도로의 확장 공사와 관련해 서독 정부의 지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진보성향의 주간지 슈피겔은 1975년 8월 4일자 기사에서 이런 점을 강조했다.
확장 공사에 필요한 재원은 총 4억5천만 마르크였는데, 이 가운데 2억9천500만 마르크를 서독이 부담하기로 하자 서독 일각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슈피겔은 당시 핀란드 헬싱키에서 헬무트 슈미트 총리와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정상회담을 하고 이 문제를 논의한 것과 관련, "슈미트는 (호네커에게) 고속도로 인근에는 동독인들이 많이 살지 않아, 실질적으로 서독을 위한 도로이기 때문에 재정지원을 할 의사가 있다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라며 "다만, (슈미트는) 그 대가로 동서독 국민의 접촉이 보다 활발하게 되도록 하는 등의 약속을 받아야 서독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독이 1983년과 1984년 동독에 차관을 제공한 것과 관련해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1984년 7월 27일 기사에서 "차관의 반대급부가 되어야 하는 동독 국민들의 서독으로의 여행 자율화 확대 등의 조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동독은 사실상 차관을 받는 대가로 국경 지역에서 5만4천여 개의 자동발사장치를 점진적으로 제거하고 서독인들의 여행 규제를 완화했다. 다만, 동독 측은 차관의 대가라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및 김대중도서관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핵 포기와 군사 적대의 종식, 평화공존을 제도화한다면 대북 교류·협력을 마다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편익은 상호주의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라며 "그러나 꼭 일대일 상호주의일 필요성은 없다. 코리아 리스크가 제거되면 그 자체가 커다란 편익이기 때문에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DMZ의 평화적 이용도 더욱 크게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동서독은 '관계 개선' 못지않게 교류·협력과 인권정책에서 보듯 동독 '개혁'의 확실한 씨앗을 차곡차곡 심었다"면서 "우리는 신동방정책이 동독 인민의 선택과 체제개혁의 뿌리를 심어놓은 측면을 보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 신동방정책 속 평화·공존의 일상화…종착역은 '통일'
서독의 신동방정책은 기존 서독 중심적인 통일정책을 뒤로하고 동독의 요구를 받아들여 동독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면서 출발했다.
동독의 셈법대로 분단이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지만, 서독 시민들은 평화와 공존을 택했다.
동방정책이 추진되면서 평화는 조금씩 일상화가 됐다.
알렌스바흐의 여론조사에서 '서독 정부가 집중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1968년 1월에는 동방정책을 꼽는 응답자가 4%에 불과했으나, 매년 점진적으로 증가해 1972년 5월에는 23%에 달했다.
반면 '평화유지'는 1968년 1월 13%였다가 1972년 5월 5%로 줄어들었다. 이 여론조사는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 베를린 연구원인 이진 훔볼트대 박사는 "소련 등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평화를 향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자 전쟁 재발 방지에 대한 기존의 요구가 크지 않게 된 것"이라며 "반면, 신동방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동서독 관계의 발전을 원하는 민의는 계속 증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독 정부 측도 신동방정책에 반대 의견을 가진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4월 탈동독민 단체 지도부와 만나 동방정책이 평화를 위한 것이고 통일은 여전히 정부의 확실한 목표라고 강조했다.
탈동독민도 정부가 통일의 목표를 잃지 않도록 견제하면서도 교류확대는 찬성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서독 시민이 느끼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었다.
알렌스바흐의 여론조사에서 '동구권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을 우려하느냐'는 질문에 1976년 2월에는 51%가 '우려한다'고 답했으나, 점점 줄어들어 1979년 9월에는 41%까지 내려갔다.
다만, 소련이 동유럽에 중거리핵탄도미사일인 SS-20을 배치한 직후인 1980년 2월에는 같은 질문에 '우려한다'는 답변이 65%로 치솟았다가 이후 점차 줄어들었다.
서독 시민들은 신동방정책에 손을 들어주는 가운데 통일은 어려워질 것이라는 인식을 보였다.
1971년 8∼9월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5%는 '동서독이 분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일이 될 것'이라는 답변은 21%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 동독은 1974년 10월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과 연관된 문구를 모두 제외하며 분리노선을 강화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서독인들의 염원만은 식지 않았다.
같은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에서 '통일이 최선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0%가 '최선'이라고 답했다. '통일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답변은 30%였다.
서독인의 일상에서 멀찌감치 멈춰있던 '통일열차'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갑자기 쾌속으로 달려왔다.
당시 동독 경제가 파산 직전까지 몰리고 동독 내 민주화운동의 파고가 거세졌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상상력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독일 통일이 예기치 못한 결과였지만 '접촉을 통한 변화'를 추구한 신동방정책이 이를 추동해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서독 주재 미국대사인 버논 월터스는 1989년 초 동방정책의 설계자였던 에곤 바와 만난 자리에서 "통일은 홍수처럼 밀려온다. 이에 맞서려고 하면 홍수에 휩쓸려 간다"고 말해 통찰력을 보여줬다.
서독인들은 눈앞으로 달려온 '통일열차'를 보고선 눈물을 흘렸다.
알렌스바흐의 1989년 12월 여론조사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보고서 눈물을 흘렸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인 44%가 '흘렸다'고 답했다.
#서독의기억 #서서갈등 #남남갈등 #동서독교류협력 #한반도교류협력 #독일통일 #한반도통일
lkbi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통일열차'에서 '평화열차'로 갈아타…평화·교류확대 편익
신동방정책 계승 보수정권, 실리적 대가 챙겨…개혁씨앗도 뿌려
서독인, 통일 염원은 컸지만 현실적 기대치는 낮아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봅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앞으로 1년간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갑니다.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을 주제로 한 첫 시리즈로 6개의 기사를 6일간 연재 중입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① 장벽만큼 높던 '서서갈등'의 해빙…東西공존 아우토반 닦아
② 동독의 '봉' 서독, 대가는 시민편익…경제의존도 키워 ←←
③ 서서갈등도 '상호성·인권'…불신임투표·위헌소송까지
④ 박명림 "北만큼 野대화 중시필요…비핵-북미수교 교환해야"
⑤ 前전독일연구소장 데틀레프 퀸…"南시민의 北방문 자유 인정 필요"
⑥ 30년전 서독청년…"장벽 무너질 때 금맥 발견한 듯"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독일 통일 이전, 서독은 도로ㆍ철도 건설 지원 및 대규모 차관뿐만 아니라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사실상 동독의 '봉'이었다.
동독은 서독과 서베를린을 잇는 제한속도 시속 100㎞의 고속도로에서 출구 도로의 속도를 절반인 50㎞로 낮췄다.
상당수의 서독인이 순간적인 감속에 어려움을 겪을 때 어김없이 숨어있던 동독 경찰관들이 나타나 벌금 딱지를 건넸다. 외화 부족에 시달리던 동독 정부 측의 '서글픈 꼼수'였다.
1986년 1월부터 5월까지 서독인들이 교통위반으로 부과받은 벌금 건수는 6만2천 건에 달했다.
같은 해 8월 29일자 주간지 디 차이트가 '동독, 값비싼 규칙 위반'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한 내용이다.
또,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인들은 하루에 25마르크를 동독 마르크로 환전해야 했는데, 쓰고 남은 금액을 다시 서독으로 갖고 나오지 못했다. 더구나 동독 마르크의 실제 가치는 서독 마르크의 3분의 1에 불과했는데, 환전은 1대 1로 이뤄졌다. 동서독 관계에서 이런 식의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동독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동독 인권 문제는 서독 내 갈등의 요소였지만, 서독 시민들은 슬기롭게 풀어나가며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진행했다.
하지만 서독인들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감수한 것도 아니었다.
신동방정책에 따른 동독과의 교류·협력 속에서 직·간접적인 '편익'을 챙겼다.
특히 동독에 대한 지원의 이면에는 서독 나름의 치밀한 레버리지(지렛대) 전략이 있었다.
서독은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의 과정에서 천문학적으로 '퍼주기'를 했다. 파산 위기의 동독에 차관을 제공해 동독 정권의 생명을 연장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서독인들은 평화를 얻었다. 분단의 고착화로 인한 민족의 이질감이 커지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동서독인의 인적 교류확대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커졌다. 평화가 찾아오자 경제적으로도 더욱 안정감을 갖게 됐다.
신동방정책을 밀어붙인 진보성향의 사회민주당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자유민주당을 소수 파트너로 삼아 정권을 잡았다.
이후 보수성향의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 내 강경파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서독인들에게 동독과의 교류·협력, 평화는 이미 삶 속의 일부였다.
나아가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은 정권을 다시 찾은 이후 경제적 지원에 대한 대가로 동독 정부로부터 인권 문제 등에서 진보정권보다 더 대가성 조치를 얻어내며 실리를 챙겼다.
그뿐만 아니라 동독체제가 서독 정부의 지원 없이는 경제적으로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의 의존성을 끌어내는 전략적인 성공을 이어갔다.
이번 기사에서는 당시 여론조사 결과와 언론 기사, 동서독 간 협상결과 등을 토대로, 서독 시민의 관점에서 동독과의 교류·협력에 대한 대가로 추구한 편익을 알아본다.
◇ 서독 시민, 서베를린으로 통행편리·동독으로 여행권리 확대 얻어
독일의 여론조사기관인 '알렌스바흐'는 지난 1972년 2월 성인남녀 2천 명을 대상으로 '동구권 국가들과의 외교에서 포기해서는 안 되는 사항'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다.
앞서 1970년 서독은 소련, 폴란드와 각각 모스크바 조약과 바르샤바 조약을 맺어 외교를 정상화했고, 이를 원동력으로 동독과 협상을 진행해 1972년 12월에는 본격적인 동서독 교류·협력의 근간이 된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서베를린 거주자들이 여타 서독 국민들과 똑같이 베를린으로의 여행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항목에 응답자의 88%가 '꼭 해야 한다'고 답했다.
'베를린 장벽과 동독 경계에서 탈주민에 대한 사격이 중지돼야 한다'는 항목에 85%가 '꼭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동독인이 서독으로의 여행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항목에도 83%가 '꼭 해야 한다'고 반응했다.
서독 정부의 신동방정책을 지원하는 여론이 다수인 상황에서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편익을 주장한 것이다.
서독 정부는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1971년 9월에는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2차 세계대전 전승국 4대국이 '4대국 협정'을 체결하도록 했다.
서독과 서베를린 간의 인적·물적 이동과 서베를린과 동독지역 간 인적 교류확대 등을 이전보다 원활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실제 기본조약 체결 후 동서독 관계가 진전되면서 서독 시민들은 동독으로 여행할 기회가 많아졌다. 1984년 한해에만 동독을 방문한 서독인은 630만 명, 서독을 방문한 동독인은 155만명에 이르렀다.
서독 정부 산하의 전(全)독일문제연구소장을 지낸 데틀레프 퀸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동서독 교류·협력을 통해 서독과 서베를린 간 고속도로를 정비하면 서독 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게 돼 서독이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논리로 정부 측이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이런 논리적 적용이 가능한 것 아니냐"라며 "북한과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면 그 편익은 러시아 및 중국과 교역을 하는 한국 기업이 가져가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친(親)기업성향의 소수당인 자유민주당이 1969년 총선에서 제1정당인 기민·기사 연합과 결별하고 사민당과 연정을 꾸린 데에도 당시 진보적인 사회적 흐름과 함께 동서독 경제협력에 대한 실리적인 시각이 반영돼 있었다.
독일 마부르크대 정치학 박사인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남북 간의 교류·접촉이 확대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철도가 연결되면 유라시아가 우리에게 들어온다"면서 "지금은 교류·접촉에 대한 실리가 관념적이지만 반복적인 접촉이 이뤄지면 실제적으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면 '퍼주기' 속에서도 대가를 얻어야 한다는 여론도 상당했다.
1970년대 중반 서독과 서베를린을 잇는 고속도로의 확장 공사와 관련해 서독 정부의 지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진보성향의 주간지 슈피겔은 1975년 8월 4일자 기사에서 이런 점을 강조했다.
확장 공사에 필요한 재원은 총 4억5천만 마르크였는데, 이 가운데 2억9천500만 마르크를 서독이 부담하기로 하자 서독 일각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슈피겔은 당시 핀란드 헬싱키에서 헬무트 슈미트 총리와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정상회담을 하고 이 문제를 논의한 것과 관련, "슈미트는 (호네커에게) 고속도로 인근에는 동독인들이 많이 살지 않아, 실질적으로 서독을 위한 도로이기 때문에 재정지원을 할 의사가 있다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라며 "다만, (슈미트는) 그 대가로 동서독 국민의 접촉이 보다 활발하게 되도록 하는 등의 약속을 받아야 서독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독이 1983년과 1984년 동독에 차관을 제공한 것과 관련해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1984년 7월 27일 기사에서 "차관의 반대급부가 되어야 하는 동독 국민들의 서독으로의 여행 자율화 확대 등의 조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동독은 사실상 차관을 받는 대가로 국경 지역에서 5만4천여 개의 자동발사장치를 점진적으로 제거하고 서독인들의 여행 규제를 완화했다. 다만, 동독 측은 차관의 대가라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및 김대중도서관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핵 포기와 군사 적대의 종식, 평화공존을 제도화한다면 대북 교류·협력을 마다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편익은 상호주의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라며 "그러나 꼭 일대일 상호주의일 필요성은 없다. 코리아 리스크가 제거되면 그 자체가 커다란 편익이기 때문에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DMZ의 평화적 이용도 더욱 크게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동서독은 '관계 개선' 못지않게 교류·협력과 인권정책에서 보듯 동독 '개혁'의 확실한 씨앗을 차곡차곡 심었다"면서 "우리는 신동방정책이 동독 인민의 선택과 체제개혁의 뿌리를 심어놓은 측면을 보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 신동방정책 속 평화·공존의 일상화…종착역은 '통일'
서독의 신동방정책은 기존 서독 중심적인 통일정책을 뒤로하고 동독의 요구를 받아들여 동독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면서 출발했다.
동독의 셈법대로 분단이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지만, 서독 시민들은 평화와 공존을 택했다.
동방정책이 추진되면서 평화는 조금씩 일상화가 됐다.
알렌스바흐의 여론조사에서 '서독 정부가 집중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1968년 1월에는 동방정책을 꼽는 응답자가 4%에 불과했으나, 매년 점진적으로 증가해 1972년 5월에는 23%에 달했다.
반면 '평화유지'는 1968년 1월 13%였다가 1972년 5월 5%로 줄어들었다. 이 여론조사는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 베를린 연구원인 이진 훔볼트대 박사는 "소련 등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평화를 향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자 전쟁 재발 방지에 대한 기존의 요구가 크지 않게 된 것"이라며 "반면, 신동방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동서독 관계의 발전을 원하는 민의는 계속 증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독 정부 측도 신동방정책에 반대 의견을 가진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4월 탈동독민 단체 지도부와 만나 동방정책이 평화를 위한 것이고 통일은 여전히 정부의 확실한 목표라고 강조했다.
탈동독민도 정부가 통일의 목표를 잃지 않도록 견제하면서도 교류확대는 찬성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서독 시민이 느끼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었다.
알렌스바흐의 여론조사에서 '동구권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을 우려하느냐'는 질문에 1976년 2월에는 51%가 '우려한다'고 답했으나, 점점 줄어들어 1979년 9월에는 41%까지 내려갔다.
다만, 소련이 동유럽에 중거리핵탄도미사일인 SS-20을 배치한 직후인 1980년 2월에는 같은 질문에 '우려한다'는 답변이 65%로 치솟았다가 이후 점차 줄어들었다.
서독 시민들은 신동방정책에 손을 들어주는 가운데 통일은 어려워질 것이라는 인식을 보였다.
1971년 8∼9월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5%는 '동서독이 분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일이 될 것'이라는 답변은 21%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 동독은 1974년 10월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과 연관된 문구를 모두 제외하며 분리노선을 강화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서독인들의 염원만은 식지 않았다.
같은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에서 '통일이 최선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0%가 '최선'이라고 답했다. '통일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답변은 30%였다.
서독인의 일상에서 멀찌감치 멈춰있던 '통일열차'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갑자기 쾌속으로 달려왔다.
당시 동독 경제가 파산 직전까지 몰리고 동독 내 민주화운동의 파고가 거세졌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상상력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독일 통일이 예기치 못한 결과였지만 '접촉을 통한 변화'를 추구한 신동방정책이 이를 추동해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서독 주재 미국대사인 버논 월터스는 1989년 초 동방정책의 설계자였던 에곤 바와 만난 자리에서 "통일은 홍수처럼 밀려온다. 이에 맞서려고 하면 홍수에 휩쓸려 간다"고 말해 통찰력을 보여줬다.
서독인들은 눈앞으로 달려온 '통일열차'를 보고선 눈물을 흘렸다.
알렌스바흐의 1989년 12월 여론조사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보고서 눈물을 흘렸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인 44%가 '흘렸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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