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너는 종이 위로 끝없이 끝없이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으므로.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있었으므로. 다시금 새롭게 보이고 들리는 장면들이 끼어든다. (…) 너를 지나쳐 간. 너를 지나쳐 온. 너의 전 생애를 증거하는 듯한. 암시하는 듯한. 꿈의 풍경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어떤 문장을. 받아 적으려고 했으나. 종이 위로 옮기려는 순간 무연히 사라져버리곤 했던. (…) 오직 너 자신만이 밝혀낼 수 있는 꿈의 내용을 오직 너 자신만이 써내려갈 수 있는 문장 위에 얹어두기 위해서.'('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부분)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처럼 시집의 주제를 잘 나타내는 제목이 또 있을까.
2008년 등단한 이제니 시인이 5년 만에 내놓은 세 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에는 고백과 독백, 그리고 그 누군가가 품고 있던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그 목소리들은 한 개인의 목소리이자 그 개인이 지금껏 겪어온 모든 사람, 헤쳐온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를 위로하듯 되돌아보며 받아쓴다.
이제니의 시는 '어제의 마음'에서 태어났지만, 줄곧 다시 시작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빛을 통해 낯선 것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부분)
'습관적으로 반추하는 오래된 기억이 있다. 그것은 함께 만들어가는 꿈입니다. (…) 사라져가는 구름 속으로 어제의 그림자를 흘려보낸다.' ('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 부분)
이처럼 그는 발화를 통해 지금껏 그가 겪어온 모든 사람, 그리고 그들 삶의 자취와 목소리를 펼쳐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대놓고 이를 건드리지 않는다.
문장들 사이에 문득문득 끼워 넣기도 하고, 낱말들의 의미가 아닌 관계를 통해 표현하기도 하며, 의미의 여백에 담아보기도 한다.
그래서 그 목소리들은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 되는 것이다.
작가의 글에서도 그는 '누군가의 울음인' 것 같은 목소리를 가만가만히 펼쳐 보이려는 시도에 대해 말한다.
'그렇게 순간의 빛으로 현현하는 죽음의 한순간 속에서. 누군가의 울음인 듯 내 속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들이 있어. 무한의 표면을 만질 수 있다면 그 목소리와 목소리의 질감으로 가만가만히 펼쳐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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