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동행 우덕순·조도선·유동하…재정지원 최재형
"최후까지 싸우라", 어머니 조마리아가 의거의 시발점
"저격 때 사용한 권총 누가 지원했는지는 정확히 규명 안 돼"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가슴, 옆구리, 복부에 3발을 맞고 주저앉았다. 나머지 총탄에 일본인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것을 목도한 안중근 의사는 현장에 있던 각국 요인들이 알아듣도록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안 의사의 거사 뒤에는 많은 조력자가 있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24일 " 안 의사 의거 110주년을 맞아 이름 없는 조력자들, 그분 한 분 한 분들을 우리 역사 속에 복원해드리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고,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도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분들에 대한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거사현장 하얼빈 동행 3인…1차 결행자 우덕순·조도선 실행 못 해
우선 안 의사와 목숨을 건 의거를 함께 도모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이 핵심 조력자로 꼽힌다.
우덕순(1880-1950)은 안 의사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사살 계획과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사를 함께할 의지를 표명했다. 안 의사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와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권총 한 자루씩을 소지하고 하얼빈으로 갔다. 안 의사는 우덕순에게 "그대가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또 내가 성공시킬 수 없다면 그대가 꼭 성공시켜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일찍 고향을 떠나 러시아 이르쿠츠크 등에 머물며 세탁업, 통역 등의 일을 했던 조도선(1879-?)도 당일 의거에 동참한 핵심 조력자다.
애초 거사는 조도선과 우덕순이 차이자거우(蔡家溝)역에서 1차로 결행하고, 실패하면 안 의사가 2차로 하얼빈역에서 저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도선과 우덕순은 차이자거우역 구내 다방에서 기회를 엿봤으나 러시아 경비병이 열차가 지나가는 시각에 다방 문을 잠가 버려 실행하지 못했다.
유동하(1892-1918)는 당시 18세 나이로 안 의사 의거를 지원했다. 1902년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보그라니츠나야로 이주해 러시아인 철도고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친 유경집과 함께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등과 구국 투쟁을 맹세하며 '7인동맹'을 결성했다.
유경집은 아들 유동하에게 안중근과 우덕순을 하얼빈까지 안내하고 의거를 결행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지시했다. 유동하는 안 의사가 의거에 성공한 뒤 러시아 헌병에 체포돼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 일시를 전보로 타전해 살인을 방조했다'는 죄목으로 복역했다.
◇ 거부 최재형 재정지원…대동공보 편집장 이강 등과 '이토 처단' 모의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꼽히는 최재형(1858-1920)은 재정지원 역할을 맡았다.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크라스키노에서 거주하던 최재형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1908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주축으로 한 구국운동단체 '동의회'가 창설됐을 때 최재형이 총장을 맡았고, 안 의사도 핵심 인사로 참여했다.
연해주에서 안 의사와 함께 왼손 넷째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혈서를 쓴 '단지회동맹(단지동맹)' 구성원들 역시 최재형의 지원을 받았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사격 연습을 한 곳도 최재형의 집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어로 '페치카'(벽난로)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동포들에게는 따뜻한 사람이었던 최재형은 변호사를 선임해 안 의사를 구명하려 했으나 재판이 러시아에서 일본 법정으로 넘어가게 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나 9세 때 연해주로 이주한 최재형은 12세 때부터 배를 탔으며, 상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재정난으로 망해가던 한인 민족지 '대동공보'를 살려 의병 등 항일투쟁 활약상이 보도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안 의사는 이 대동공보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대동공보의 편집책임자는 이강(1878-1964)도 의거의 조력자 중 한 명이다. 안 의사는 대동공보사에서 이강, 유진률, 정재관, 윤일병, 정순만 등이 모인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짠 것으로 전해진다.
이강은 안 의사 의거가 성공한 뒤에는 안 의사를 위한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베이징에 파견되어 활동하는 등 핵심 조력자로 꼽힌다.
대동공보사에서 함께 일한 이강과 유진률은 1909년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안 의사와 우덕순을 배웅하면서 "지금 삼천리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라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안 의사가 하얼빈에 도착해 거사를 치를 때까지 방을 내준 김성백도 최근에야 조명됐다. 러시아 국적을 보유한 그는 하얼빈 만주지방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의 한 전문가는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인) 공립협회의 블라디보스토크지회가 안 의사 의거를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최근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이 밖에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벨기에제 브라우닝 8연발 권총을 제공한 '미상의 인물'도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다. 안 의사가 7발을 쏘고 1발은 격발하지 않았던 이 권총은 핵심 조력자인 이강, 최재형, 이석산이 제공했다는 설과 안 의사가 원래부터 소지하고 있던 것이라는 설이 교차한다.
그러나 '집안일 걱정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며 항일 독립운동을 격려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야말로 안중근 의거를 있게 한 시발점일 것이다.
조 여사는 의거 후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 의사의 면회를 거부하면서,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면서 손수 만든 수의를 면회 간 (안 의사)사촌 동생을 통해 건넸다는 일화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비장한 장면으로 꼽힌다.
조 여사는 슬하의 3남1녀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시켰고, 본인도 직접 연해주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하다가 1927년 향년 66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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