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병원에 모셨나" 유족들 죄책감, 화재 후 사람 발길 '뚝'
밀양시, 26일 오후 세종병원 주차장에서 유족 중심 추도식 거행
[※ 편집자 주 = 오는 26일이면 경남 밀양 세종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고령자를 중심으로 2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낸 지 1년이 됩니다. 공식 '화재사'로 분류된 사망자만 45명이었고 입원 환자 가운데 화재 사건 후 기저질환 등으로 치료 중 사망한 사람도 17명이나 됐습니다. 바로 옆에 요양병원이 있다 보니 일반 급성기병원과 요양병원을 오갔던 중소도시 고령 환자들의 희생이 너무 크고 참혹했습니다. 병원은 방화문 하나 제대로 없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연합뉴스는 화재 참사 1주년을 맞아 전국 중소병원 등의 화재를 막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기사를 두 편 게재합니다]
(밀양=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192명의 사상자를 낸 밀양 세종병원 불은 5층짜리 병원 건물 1층에 있는 응급실 탕비실 천장에서 시작됐다.
'불이 났다'는 119 신고가 접수된 지 3분만인 오전 7시 35분 밀양소방서 가곡센터 소방대와 밀양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소방대원들이 곧 큰 불길을 잡았고 불은 2층 이상으로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연기는 이미 병원 전체를 집어삼켰다.
구조대원들과 시민들이 환자들을 업거나 담요에 싸서 대피시켰지만, 사상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환자들은 응급실이나 병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불이 붙기 쉬운 스티로폼 등 건물 내장재가 탈 때 발생한 유독성 연기에 질식해 쓰러졌다.
화재 당일에만 입원환자, 의사, 간호사 등 37명이 숨지고 143명이 다쳤다.
밀양시는 사망 45명, 부상 147명 등 세종병원 화재 사상자를 192명으로 최종 집계했다.
40명이 숨진 2008년 1월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이후 최근 10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화재 중 최악의 인명피해다.
병마를 툭 털어버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 나가야 할 곳이 죽음을 맞은 비극의 장소가 됐다.
◇ "하필 그 병원에" 유족들 1년 지나도록 죄책감 시달려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은 김승환(62) 씨를 지난 22일 밀양시청 근처 찻집에서 만났다.
그는 세종병원 화재로 장모(당시 90살)가 숨졌다.
김 대표는 앉자마자 유가족들이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하필 왜 그 병원에 모셨을까'라는 후회와 미안함이 유가족들 마음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 역시 화재 발생 일주일 전에 창원의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던 장모를 세종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집 가까운데 장모님을 모시려고 한 것이 이렇게 됐다"며 "장모님이 밀양으로 돌아온다고 좋아하셔서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점이 마음이 걸린다"고 털어놓았다.
김 대표는 주부 이모(당시 35살) 씨의 사망 사실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노인들이 많은 지방 소도시 특성상 세종병원 사망자 80% 이상이 70대 고령이었다.
이 씨는 세종병원 사망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이 씨는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화재 발생 한 달 전쯤 세종병원으로 왔다.
12살 나이 많은 띠동갑 남편 사이에서 낳은 뇌병변 장애아들(15)은 졸지에 엄마를 잃었다.
김 대표는 "어린 자식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여전히 아프다"고 말했다.
◇ 희생자 45명 중 40명 보상…5명은 합의거부 민사소송 진행
세종병원 화재 참사는 1년을 맞았지만, 아직 진행형이다.
화재 탓에 숨졌다고 결론 난 45명 중 40명은 위로금, 생활안정자금 형태의 보상금을 받았다.
세종병원을 운영한 효성의료재단이 26명에게 보상했고, 나머지 14명은 밀양시에서 지급했다.
김정태 밀양시 사회재단 담당 주무관은 "효성의료재단에 돈이 없어 일단 밀양시에서 보상금을 지급했고 추후 재단에 구상권을 청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당시 당직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젊은 환자 희생자 등 5명은 보상액수가 적어 합의를 거부했다.
이들은 재단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형사책임을 묻는 절차는 이보다 더디다.
창원지검 밀양지청은 세종병원이 전기배선 정밀점검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반복된 건물 증축 여파로 2017년에 누전이 3차례 발생하는 등 화재 발생 위험성이 상존했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지난해 3월 15일 병원을 운영한 효성의료재단 이사장 손모(57) 씨, 병원장 석모(54) 씨, 총무과장이자 소방안전관리자 김모(38) 씨, 행정이사 우모(60) 씨 등 병원 주요 간부들을 재판에 넘겼다.
법정공방이 9개월이나 이어졌다.
지난해 12월 21일에야 결심공판이 열렸다.
검찰은 이사장 손 씨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총무과장이자 소방안전관리자 김 씨에게는 금고 3년을, 행정이사 우 씨에게는 징역 5년을, 병원장 석 씨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심리를 종결하며 검찰은 세종병원 화재가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人災)라며 이런 사고로 인명이 더는 희생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고 공판은 오는 2월 1일 열린다.
◇ 병원 폐업, 깨진 유리창 그대로…주변 가게 문 닫고 발길 끊겨
세종병원 참사는 지역사회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화재 후 병원은 문을 닫았고 건물은 방치됐다.
입구는 칸막이로 굳게 닫히고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연기로 그을렸던 벽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병원 주변은 한낮인데도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인구가 10만여명에 불과한 밀양시는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다.
주민들은 병원을 드나들던 환자, 보호자, 간병인이 사라지는 등 이웃들이 떠나버린 점을 가장 힘들어했다.
세종병원 맞은편 가게인 진보상회 주인 김영조(73) 씨는 "가게를 찾은 세종병원 환자들, 직원들이 물건도 사주고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곤 했는데…"라며 "이제는 사람 발길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유동 인구가 준 이유 때문인지 문이 굳게 잠긴 채 먼지가 쌓인 창틀 사이로 '임대' 표시를 한 가게도 여러 곳 눈에 띄었다.
주민 박명호(58) 씨는 "건물을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고, 세를 놓아도 임대가 안 된다"며 "참사 자체도 고통이지만 지역 경기가 더 어려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누군가가 현재 경매에 나와 있는 세종병원 건물과 부지를 낙찰받아 다시 병원을 열어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냈다.
밀양시는 1주년을 맞는 오는 26일 오후 세종병원 주차장에서 추도식을 올리며 화마로 숨진 이들을 위로한다.
김 대표는 "간소하지만 엄숙하게 추도식을 하고 싶다는 유족 뜻을 받들어 구조나 봉사에 참여했던 시민들만 모시고 행사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sea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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