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제안 통한 이사 해임 등 경영참여형 주주권행사에 반대 우세
최고의결기구 기금운용위의 1월말∼2월초 최종 결론 주목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국민연금 주주권행사 전문위원회가 조양호 회장 일가 일탈 행위로 기업가치가 훼손된 대한항공[003490]과 한진칼[180640]에 대한 경영참여 주주권행사에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첫 적용 사례로 한진그룹을 정조준했던 데서 한 발짝 물러난 모양새이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23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회의를 열어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한 주주권행사 여부와 범위를 논의했다.
이날 수탁자책임위는 조 회장 등 회사 이사들의 배임 행위와 총수 일가의 각종 '갑질' 행위로 대한항공과 한진칼의 주주가치가 훼손됐는지를 검증하고, 주총에서 주주권행사 방안과 이후 후속 조치 등을 전반적으로 검토했다.
이날 회의에서 위원들은 주주제안을 통한 이사해임, 사외이사선임 정관변경 요구 등 경영참여형 주주권행사에 부정적 의견을 많이 냈다.
총 위원 9명 중에서 2명만 경영참여 주주권행사에 찬성했고, 5명은 반대했다.
나머지 위원 2명은 대한항공에 대한 경영참여 주주권행사는 반대하고, 한진칼에 대한 부분 경영참여 주주권행사에는 찬성했다.
구체적으로 대한항공 경영참여 주주권행사에 대해 찬성 2명, 반대 7명이었다.
한진칼 경영참여 주주권행사에 대해서는 찬성 4명, 반대 5명이었다.
찬성측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반대 측은 단기매매차익 반환 등 기금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를 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지분 11.56%를 가진 2대 주주이며, 한진그룹의 지주회사인 한진칼의 지분 7.34%를 확보한 3대 주주이다.
수탁자전문위는 이처럼 위원간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합의하지 못하자 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는 의원들의 의견을 그대로 보고하기로 했다.
수탁자책임위에서 이렇게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옴에 따라 국민연금이 당장 적극적 주주권행사를 통해 한진그룹 경영에 참여할 기세는 한풀 꺾일 것으로 보인다.
수탁자책임위의 많은 위원이 경영 참여 주주권행사에서 후퇴한 데는 무엇보다 기금수익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민연금은 '단순 투자' 목적으로 대한항공과 한진칼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자본시장법상 수탁자 책임활동을 하려면 '경영참여'로 변경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지분 1% 이상 변동 때 5일 이내 신고해야 하고, 6개월 이내 발생한 매매차익은 반환해야 한다.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쉽지 않은 결정일 수밖에 없다.
또 현행법상 제약 등 주주권행사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는 점이 영향을 줬을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총수 일가의 범법행위를 감독하지 못한 다른 이사들에 대한 해임안건은 이사회에서 거절할 수 있다. 이사회 지배구조 개선방안을 제안하거나 횡령·배임 등으로 회사의 손실을 입힌 사람의 임원 자격을 제한하는 정관개정은 주주총회의 특별결의가 필요해 국민연금이 주주제안을 하더라도 실익을 거둘 수 없는 실정이다.
여기에다 재계의 우려가 한몫 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이 올해 수탁자책임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투자기업에 대한 목소리를 키우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자 경영계에서는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 22일 가진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국민연금이 한진칼·대한항공에 대한 적극적인 주주권행사를 추진하는 데 대해 "한진그룹을 시작으로 다른 기업에도 확대되는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상당히 걱정스러운 시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16일 위원회 산하 수탁자책임위가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행사 여부와 행사 범위를 검토하도록 했다.
기금위는 수탁자책임위의 논의 결과를 토대로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한 주주권행사 여부와 행사범위를 이달말이나 2월초에 확정하기로 했다.
기금위가 수탁자책임위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기로 했지만, 최종 결론을 어떻게 낼지는 미지수다.
기금위가 수탁자책임위의 결론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속단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수탁자책임위는 지난해 7월 말 국민연금이 주주권행사의 투명성·독립성 제고를 위해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서 구성한 조직이다. 기존에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를 자문하던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확대, 개편했다.
대한항공은 국민연금이 기업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서한을 가장 많이 발송한 기업으로 국민연금의 중점 관리기업이다.
국민연금은 2015년 1월 '땅콩 회항' 사건을 계기로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비공개 서한을 발송한 데 이어 2017년 4월 대한항공 본사 경찰 압수수색, 작년 4월 협력업체 직원 폭행 관련 경찰 조사 국면에서도 비공개 서한을 보냈다.
이어 작년 6월에는 관세청, 검찰, 출입국관리소 등이 조 회장 일가의 밀수 혐의 등을 조사하자 경영진 면담 요청을 위한 공개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이 주식을 보유한 기업에 공개서한 발송이라는 주주권을 행사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조 회장은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납품 통행세를 챙기는 등 270억 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으며, 부인과 세 남매는 '땅콩 회항', '물컵 갑질', '부정대학편입', '공사현장 업무방해' 등의 사건으로 회사 이미지와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sh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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