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공동책임론' 다룬 명저…"상호 신뢰 낮으면 전쟁 가능성 커져"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북핵 위기론이 한창이던 2017년 12월 제프리 펠트먼 당시 유엔 사무차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펠트먼은 당시 리용호 외무상을 만나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군 연락 채널을 복원하고 미국과 대화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내는 동시에 유엔 안보리 비핵화 결의를 이행하라는 세 가지 요구 사항도 전했다.
이와 함께 펠트먼이 리 외무상에 건넨 것이 하나 더 있다. 비밀문서도, 모종의 합의를 위한 요구서도 아니었다. 그냥 '책' 한 권이다.
펠트먼이 전달한 책은 영국의 석학 크리스토퍼 클라크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지은 '몽유병자들(The Sleepwalkers)'. 영어 원서로 된 두꺼운 역사책이었다. 책의 부제는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다.
무려 100년도 더 넘게 오래된 옛날 먼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 원인을 다룬 책을 유엔 지도부가 왜 북한 측에 전달했을까. 당연히 외교적 메시지가 담겼을 것이다.
당시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외부 기고 칼럼에서 '펠트먼이 의도치 않은 충돌의 위험을 지적하는 메시지를 극대화하려고 리 외무상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책이 출간된 2014년은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세계적 석학들이 1차 대전을 새롭게 조명한 책들을 잇달아 출간했으며, 이 가운데 최고 평가를 받은 책이 바로 '몽유병자들'이었다. 뉴욕타임스, 인디펜던트, 파이낸스 타임스 등 영미권 주요 일간지들도 몽유병자들에 대한 호평을 쏟아냈다.
책은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7월 위기'를 소재로 '왜'가 아니라 '어떻게' 전쟁이 발발했느냐에 초점을 맞췄다. 누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느냐는 책임론으로 흐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게 저자 설명이다.
저자는 오히려 유럽 국가들의 개전 '공동책임론'을 강조한다.
전쟁이 일어나고 확산하는 과정에서 다자간 상호 작용을 간과하고 한 나라에 전쟁 책임을 지우거나 교전국들에 대한 '유책 순위'를 매기는 것은 그리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일이라는 점을 치밀한 역사 서술을 통해 입증하는 데 집중한다.
우리가 예전에 알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책임이 크다는 선입견 대신 프랑스와 러시아 역시 만만찮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정 국가의 전쟁 범죄가 아닌 유럽 국가들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비극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특히 저자는 당시 유럽 각국 지도자들 앞에 다양한 선택지가 열려 있었으며, 충분히 다른 미래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계획한 나라가 없었음에도 상호 신뢰 수준이 낮았고 피해망상 수준이 높았던 각국 지도부는 서로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당시로선 인류 최악의 비극을 초래하는 '판도라 상자'를 열고 말았다.
망상에 사로잡힌 채 앞으로 초래할 거대한 사건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에 책을 건넨 유엔의 의도도 분명한 듯하다. 북한 지도부가 이러한 몽유병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는 조언 또는 경고였다는 해석이 타당해 보인다.
우리나라는 '책과함께'에서 오는 28일 공식 출간한다. 이재만 옮김. 1천16쪽. 4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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