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왕세자, 이라크 총리에 "전폭 지원" 약속
이란, 이라크에 에너지 공급…경제·안보 밀착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중동의 패권 경쟁국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라크에 앞다퉈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급선무였던 이슬람국가(IS)와 전쟁이 마무리되자 중동에서 지리적 위치뿐 아니라 안보, 군사, 원유 분야의 요충지인 이라크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이라크 총리실은 24일(현지시간)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압델 압둘-마흐디 총리에게 전화해 이라크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발표했다.
압둘-마흐디 총리는 이에 "사우디와 관계 증진을 환영한다"고 화답했다.
이라크와 사우디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이었던 1990년 걸프 전쟁 이후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가 2016년에서야 바그다드에 사우디 대사관을 재개하면서 거리를 좁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듬해 사우디 항공사가 걸프 전 이후 27년 만에 이라크 직항편을 다시 취항했고 전후 재건 사업을 지원하는 이라크-사우디 공동위원회가 출범했다.
IS 격퇴전 과정에서 부쩍 커진 이란의 이라크에 대한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라크의 정계를 이란에 우호적인 시아파가 주도하고 국경이 인접한 덕분에 이란의 입지는 사우디보다 유리하지만 이라크와 관계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이란 입장에서는 서쪽으로 이라크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면 안보에 큰 위협이 되는 데다 시리아, 레바논 등 이른바 '시아파 벨트'의 중심부가 끊겨 지리적으로 고립될 수 있어서다.
최근엔 동쪽으로 맞닿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에 맞섰던 탈레반이 미국과 평화협상을 진척하면서 이란이 주변국의 움직임에 민감해졌다.
양국은 고위 인사들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접촉면을 넓혀왔다.
이란은 자국 내 전력도 충분하지 않은 처지이면서도 시아파 거주지역인 이라크 남부에 전력과 발전용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등 이라크에 공을 들인다.
이런 상황을 방증하듯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이 13일부터 닷새간 이라크를 방문했다. 중동 외무장관 가운데 가장 바쁘다는 자리프 장관이 한 나라에 닷새간이나 머문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자리프 장관은 방문 기간 이라크의 총리, 대통령, 경제부처 장관 등 전·현직 정부 고위 인사, 의회 의장, 종교 지도자, 쿠르드자치정부 수반, 각 정파의 지도자를 두루 만났다.
자리프 장관은 이란 기업 대표단과 동행해 이라크 현지에서 경제 협력에 집중했다. 수도 바그다드뿐 아니라 남부 카르발라, 나자프 등 시아파 성지를 비롯해 북쪽 쿠르드 자치지역 아르빌, 술레이마니아 등 이라크 전역을 누볐다.
그의 방문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이라크를 방문해 이란에 대한 압박을 주문한 지 불과 나흘 뒤 이뤄졌다.
자리프 장관은 16일 카르발라에서 이라크 관리들을 만나 "IS를 격퇴한 이라크가 재건을 원한다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협력자는 이란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사우디 등 친미 진영과 이란 사이에 낀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이라크 정부의 '줄타기' 외교도 관심사다.
중동에서도 외세에 유난히 간섭받았던 이라크는 전후 재건, 석유 생산, 안보 등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친미 진영과 이란 측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트럼프 정부가 대이란 적대 정책을 강화, 중동 국가에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하는 상황에서 이라크의 행보는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이라크 정부는 미국, 사우디, 이란 모두에 "협력해야 한다"면서 원론적인 입장만 밝힐 뿐 명확히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중동의 두 패권국 사이에서 이라크의 실리 외교가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효과를 낳을지, 또다시 외세의 희생양이 될지가 중동의 안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처럼 이라크와 밀착하려는 이란, 사우디 모두 1980, 90년대에는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던 적국이었다는 점에서 소용돌이와 같은 중동 정세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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