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주최 '3·1절 기념식' 열렸던 그곳…대회장인 '올림픽 극장' 터엔 고층상업건물
"자동차 타고 태극기 흔들며 일본인 거주구역 홍커우 진출"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중국 상하이 중심의 번화가인 난징시루(南京西路)에는 축구장 절반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벅스 매장인 '상하이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가 있다.
세계적인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이곳을 찾아오는 한국인 관광객도 끊이지 않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상하이 스타벅스 리저브'라는 해시태그를 단 방문 후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상하이를 찾는 많은 한국인이 독립운동의 성지(聖地)와 같은 임시정부 청사 기념관이나 루쉰공원(옛 훙커우공원)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찾아가곤 한다.
하지만 난징시루의 스타벅스 매장 바로 앞이 근 100년 전 한인들의 독립 만세 행진이 펼쳐진 역사적인 장소였다는 사실까지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꼭 1년이 지난 1920년 3월 1일.
이른 새벽부터 상하이의 밍더리(明德里), 바오캉리(寶康里), 샤페이루(霞飛路) 일대에 사는 한인들의 집에 태극기가 속속 내걸렸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상하이의 3·1절'이라는 당시 기사에서 "상하이 시내에 이렇게 대한의 국기가 날린 것은 금차(이번이)가 처음이다"며 "비로소 세계 각국인이 모여 사는 상하이 한복판에서 '우리는 대한인이다'라고 하는 표(標)를 보인 것"이라고 기록했다.
임정 요인들과 상하이 한인들에게 첫 3·1운동 기념식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었다.
이들은 첫 3·1운동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이 일제의 폭력적인 3·1운동 진압에도 독립을 향한 민족의 의지가 결코 꺾이지 않고 더욱 강렬해질 것임을 만방에 알리는 항쟁이라고 인식했다.
이날 이동휘 국무총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오전 임시의정원에 모여 3·1절 기념식을 먼저 개최했다.
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오후 2시에 맞춰 상하이와 일대의 한인 700여명은 대형 서양식 극장인 올림픽극장으로 모여들어 3·1절 축하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지금은 헐린 옛 올림픽극장이 있던 곳이 바로 지금 '상하이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의 길 건너편이다. 올림픽극장이 있던 곳에는 현대식 고층 상업 건물인 후이인(匯銀)빌딩이 들어섰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쑨커즈(孫科志) 푸단(復旦)대 역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당시 상하이의 한인은 700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일대의 거의 모든 한인이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자 모여든 셈이다.
쑨 교수는 "임정 요인들은 당시 3·1운동으로 세계에 한국의 독립을 이미 알렸다고 생각하고 일제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것만 남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며 "그들에게는 첫 번째 3·1운동 기념행사는 새로운 출발점으로서 큰 의의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독립신문 기사를 보면, 교민단이 주최한 축하회 무대 위에는 대형 태극기가 교차해 내걸린 가운데 '대한독립 선언기념', '독립 만세'라는 문구가 쓰인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행사는 이 국무총리와 임정 내각 총장들, 손정도 임시의정원 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민단장 여운형의 사회로 진행됐다.
축하식은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돼 이 총리와 손 의장의 축사, 독립군가 합창 등 순으로 이어진 뒤 만세 삼창으로 끝을 맺었다.
주최 측이 극장 입구에서 참석자들에게 손에 드는 태극기를 나눠줘 장내가 태극기의 바다로 변했다고 독립신문은 당시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1920년 첫 3·1운동 축하식 사진은 찾을 수 없지만 이와 유사한 규모로 치러진 1921년 축하식 사진이 남아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기념식이 끝난 오후 4시께, 감격이 가시지 않은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극장 앞 거리(지금 스타벅스가 들어선 곳)로 쏟아져나왔다.
봄비가 내리는 속에서 한인들은 징안쓰루(靜安寺路·현 난징시루) 전찻길을 걸으며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일부 한인들은 자동차 여러 대에 나눠타고 태극기를 달고 당시 일본인들의 거주지인 훙커우까지 진출해 '독립 만세'를 외쳐 일본 당국을 바짝 긴장시켰다.
독립신문은 '우중(雨中)의 행진'이란 기사에서 "독립 만세를 더욱 고창(高昌)하며 일인의 시가인 훙커우 방면으로 돌진하여 심야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는데 러시아인들은 '우라'(만세)를 부르고, 중국인은 박수로 환영하는데 일인은 비슬비슬 보기만 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후 상하이의 한인들에게 3·1운동 기념식 후 자동차 등을 동원해 거리 만세 시위에 나서는 것은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적극적인 저항 움직임은 상하이뿐만 아니라 중국의 다른 지역의 한인 사회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중국의 유력지 신보(申報)는 1920년 3월 4일 자에서 3월 2일 톈진(天津)의 한인들이 자동차를 타고 영국 조계지에 들어가 전단을 뿌리고 만세를 외쳤다고 보도했다.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논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삼일절 기념과 3·1운동 인식'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삼일절 기념식은 한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한 3·1운동의 기억을 되살리고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 해방을 맞이하겠다는 독립 의지를 다짐하는 날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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