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심 "과도에 남은 쪽지문이 범행 증거" 유죄판결…"범행 입증 안 돼" 상고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10년 전 성폭행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쪽지문과 같은 지문을 가졌다는 남성이 7년 만에 재판에 넘겨져 1·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사건이 대법원 최종 판단을 받게 됐다.
피고인은 '성폭행 직접 증거 없이 불분명한 간접증거만으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판결은 부당하다'며 상고를 제기했다.
사건은 10년 전 비 오는 겨울밤인 2009년 11월 29일 오전 3시 30분께 발생했다.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부산 해운대구 한 주택 열린 현관문으로 한 남성이 침입해 주방에 있던 흉기로 잠자던 부녀자 A씨를 위협해 성폭행하고 달아났다.
A씨 남편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 전화하는 30∼40분 사이 범행이 벌어진 것이다.
A씨는 귀가한 남편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렸고 남편은 2∼3시간 만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과도 칼날에서 범인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문 2점을 채취했다.
A씨 남편은 방바닥에 떨어진 과도를 발견해 싱크대 위에 올려놨다고 수사기관에서 진술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A씨 몸과 집에서는 타인 DNA와 체모 등이 나오지 않았다.
과도에서 발견된 쪽지문은 "범인은 약간 큰 키에 보통 체격, 얼굴은 약간 큰 편, 머리는 짧은 편"이라는 A씨 진술과 함께 이 사건 유일한 간접증거였다.
당시 경찰은 쪽지문을 감정했지만, 대상자를 찾지 못해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2005년 경찰은 미제사건을 재조사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쪽지문 재감정 결과 B(56)씨 지문과 같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B씨는 A씨 집과 480m 떨어진 곳에 거주하던 남성이었다.
B씨는 사건 발생 6년 만에 주거침입 강간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전과가 없는 회사원 B씨는 "A씨 집에 간 사실조차 없다"며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1심은 "전문가 4인의 동일한 지문 감정 결과는 오류 가능성이 매우 낮고 믿을 만하다"며 "이를 근거로 A씨가 진술한 범인 체격과 주거지 등을 고려하면 B씨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며 징역 5년을 선고했다.
2심 역시 "사건 범행 내용, 장소 등을 조건으로 한 지문검색 방법은 합리적이며 감정 정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피고인은 진범이 피고인 지문이 묻은 과도를 두고 가는 등 다른 가능성을 주장하지만 이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고 B씨 항소를 기각했다.
B씨 변호인인 법무법인정인 권영문 변호사는 "1·2심에서 B씨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 입증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강간 사건임에도 과도에 남은 지문 외에는 DNA 등 범인 흔적이 없는 이상한 사건이라고 전제한 권 변호사는 우선 유일한 간접증거인 과도가 범행에 사용됐는지, 칼날에서 나온 지문이 범인의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A씨와 A씨 남편은 범인이 과도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 범인이 직접 과도를 꺼내거나 범행 후 과도를 버리는 장면을 보지 못해 범행 사용 여부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범인이 과도로 A씨를 위협했다면 칼날이 아닌 손잡이 등 과도 다른 부위에도 지문이 남아야 했지만, 지문이 없었고 과도를 직접 만졌다고 한 A씨 남편 지문도 검출되지 않은 점도 의문이라고 권 변호사는 말했다.
특히 과도 칼날 위에 남은 지문 위치와 방향이 비정상적이라는 지적이다.
권 변호사는 "칼날 위에 오른쪽 검지 지문 2개가 겹쳐 찍혔는데 이런 지문 모양이 나오게 과도를 잡으려면 손가락으로 칼날을 마주 보게 잡아야 하는데 범행과정에서 찍힌 지문으로 보기에는 이상하다"고 주장했다.
현행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 오류 가능성과 한계도 언급했다.
권 변호사는 "과도에서 발견된 지문은 온전한 형태가 아닌 쪽지문인 데다 성별·출생연도(1940∼1975년)·주소(부산시 해운대구) 등을 조건으로 검색한 한정된 지문 후보군에서 맨눈으로 찾은 가장 일치한 지문일 뿐 100% 같은 지문이 아니고 전체 지문 대조군을 비교해 찾은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권 변호사는 "설사 과도에서 나온 지문이 B씨 것이더라도 강간 범행과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경위로 피해자 방에서 발견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에 상고가 접수된 이 사건은 현재 담당 재판부 배정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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