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사림과 훈구 세력은 과연 실존했나

입력 2019-02-06 09:05  

조선 전기에 사림과 훈구 세력은 과연 실존했나
여말선초 분석한 신간 '고려에서 조선으로'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려시대 후기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이르는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 정치사 서술에는 대개 보혁 갈등 구도가 적용된다.
고려 집권층인 권문세족이 부패하면서 지방에 근거지를 둔 신진사대부가 등장해 조선 건국에 기여했고, 조선 전기에는 공훈을 세워 관직에 오른 훈구파에 대항해 개혁 세력인 사림파가 나타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신진사대부와 사림파가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려고 노력해 정권을 장악했다는 주류 견해에 맞서서 이들의 대척점에 권문세족과 훈구파를 세우는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역사 해석을 비판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계간지 '역사비평'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를 단절적으로 보는 시각을 재검토한 글을 2017년 8월부터 1년간 잇따라 실었고, 관련 논문 16편을 모아 신간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펴냈다.
송웅섭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지배 세력의 변동과 유교화'라는 글에서 조선 전기 향촌사회에는 통념처럼 유교적 가치와 풍속이 널리 퍼지지 않았으며, 훈구파나 사림파 같은 특정 정치 세력은 실존하지 않았다는 파격적 견해를 내놓았다.
흔히 신진사대부와 사림은 향촌에 사는 재지사족(在地士族) 출신으로 중국에서 새로운 유학과 선진농법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송 연구원은 "이 시기 사료에 나타나는 지방 유력자들은 새로운 사회질서의 수용에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이거나 지체된 행동을 보였다"면서 15∼16세기 향촌사회에서 보이는 음사(淫事)와 관련된 모습을 그 근거로 내세웠다.
당시 지역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산천에 지내는 제사는 방탕한 짓, 즉 음사로 규정됐다. 하지만 16세기 말까지 음사적 성황제는 광범위하게 존속했고, 사족들도 이에 참여했다고 송 연구원은 강조했다.
그는 조선 중기 문신 묵재(默齋) 이문건(1494∼1567)이 남긴 '묵재일기'(默齋日記)를 고찰하면 사대부인 이문건이 기복 민속의식의 요청자이면서 시행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서 관이 주도한 기우제나 산천제 같은 정기적 의례가 유교화 진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송 연구원은 "여말선초 향촌 사족은 관권에 저항하며 자치권을 확보한 '반항아' 모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권과 타협하고 보편적 가치를 차츰 수용해가며 향촌사회에서 자기 위상을 강화한 '모범생' 모델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아울러 그는 권문세족과 훈구파, 신흥 유신과 사림파를 조선 후기 붕당처럼 학맥·가문·지연·관직으로 얽힌 정치 세력으로 간주하기 어렵다고 역설했다.
기존에도 권문세족과 훈구파는 뚜렷한 실체를 지닌 집단이라기보다는 신진사대부와 사림파 세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반대편에 설정한 모호한 존재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송 연구원은 "성종과 중종이 훈구파를 제어하기 위해 사림파를 기용했다고 하지만, 두 왕은 그런 정도의 왕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며 "그런 조처를 했다면 대간직뿐 아니라 관료 조직 전체가 들썩이는 대대적 인사이동이 있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간의 언론이 활발해지고 대신에 대한 탄핵이 거침없어진 것은 새로운 세력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청요직(淸要職·감찰과 간쟁 임무를 맡은 벼슬)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권력 구조의 변화와 관련된 현상이었다"고 비판했다.
송 연구원은 "신진사대부와 사림파 등장을 사회경제적 변화와 연결하려면 발전상을 구체화할 실증적 연구가 필요한데, 이러한 사안마다 학계에서는 '신진사대부와 사림파의 활동으로 가능했다'는 환원론적 설명을 하곤 했다"며 "사회 변화를 정치 세력과 즉자적으로 잇는 접근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요근 서울대 교수는 머리말에 "조선왕조 개창 세력의 역사 인식에서 한 걸음 벗어난다면 조선 건국을 '과거와의 단절' 혹은 '미래로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연속'과 '계승'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역사비평사. 480쪽. 2만2천원.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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