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혁명 40년]①파리에서 온 카세트테이프…'여명의 시작'

입력 2019-02-10 07:05  

[이란혁명 40년]①파리에서 온 카세트테이프…'여명의 시작'
망명 호메이니 "팔레비 왕정 전복하고 이슬람공화국 세우자" 호소
호메이니 아들 사망후 반정부시위 본격화…무력진압으로 유혈사태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1978년 10월. 파리 외곽 시골 마을 노플르샤토에서 테헤란으로 카세트테이프가 전달된다.
이 카세트테이프는 수천번 복사돼 이란 전역으로 퍼졌다.
카세트테이프 속 음성의 주인공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당시 이란을 통치한 팔레비 왕정을 전복하고 쿠란의 가르침대로 이슬람 법학자가 통치하는 '이슬람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연설했다.
비록 음성뿐이었지만 이란 국민의 마음은 요동쳤다.
청년 시절 이 테이프를 들었다는 테헤란 시민 모하마디(62)씨는 "잡음이 많이 섞여 음성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끓어 올랐다"며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샤(왕)와 미국을 타도했다"고 기억을 전했다.
당시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파리에서 망명 중이었다.
그의 망명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레비 왕정을 복원한 미국 정부는 대중 동원력이 큰 이슬람 성직자 세력이 결합한 이란의 민족주의를 약화해야 한다는 판단에 모함마드 레자 샤(왕)를 앞세워 1963년 서구식 개혁 정책인 '백색혁명'을 추진했다.
백색혁명은 토지개혁, 산림의 국유화, 국영회사 매각, 노동자에 대한 이익배당, 문맹 퇴치, 여성 참정권 부여 등의 내용을 골자로 했다.
이 가운데 토지개혁과 여성 참정권 부여는 이슬람 종교세력의 반발을 샀다. 무엇보다 이 개혁이 주체적인 결정이 아닌 이슬람의 교리에 어긋나는 미국의 '주문'을 왕정이 그대로 이행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커졌다.
팔레비 왕정은 대화나 설득보다는 무력으로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반정부 시위가 종교교육도시 곰에서 시작돼 이슬람 신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그 중심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있었다.
이 과정에 곰의 신학교 페이지예의 학생들을 정부가 폭력으로 진압해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더 광범위해지고 격렬해진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려고 정부는 1964년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추방한다.
그는 이후 터키, 이라크를 거쳐 1978년 10월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에 거처를 마련한다.
반정부 시위는 강제로 잦아들었지만 1963년을 거치면서 이슬람 성직자가 반정부, 반왕정 세력의 중심이 됐고, 중심 이데올로기는 전근대적 민족주의, 사회주의 대신에 이슬람 교리가 차지했다.
동시에 이란 국내에서는 다른 아야톨라와 비교해 인지도가 낮았던 호메이니가 급진적이고 강경한 반정부 투쟁 전면에 나서면서 이란 국민의 영적 지도자로 부상했고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팔레비 왕정의 탄압 속에서도 이란 국민의 반발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불씨를 댕긴 사건은 1977년 벌어졌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아들 무스타파가 사망하자 왕실의 암살설이 널리 퍼졌고, 모스크와 신학교는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다.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외국에서 반정부 시위를 독려했고, 아들을 비참하게 잃은 정신적 지도자의 호소는 이란 국민을 거리로 나서도록 했다.
1978년 1월부터 곰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에서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신학도 7명이 숨지는 사건이 나면서 40일마다 주기적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아르바인 저항)가 이어졌다.
정부는 '배후 조종자'인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헐뜯는 기사를 관영 매체에 내보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해 8월 이란 남부 아바단의 극장에서 터진 비극은 성난 군중이 폭발하는 화약이 됐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극장에 불을 질러 어린이를 포함해 400여명이 몰살당했다.
정부는 반정부 세력을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이미 민심은 다른 쪽으로 기울어진 터였다.
1978년 9월 8일 금요일.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겠다는 정부의 경고 담화문에도 테헤란 절레 광장(현재 쇼하더 광장)에 군중 수만 명이 모였다.
진압 병력이 쏜 총에 시민 120여명이 사망(검은 금요일)했다는 소식이 이란 전역에 빠르게 전해졌고, 왕정을 전복하자는 혁명의 불꽃이 본격적으로 타올랐다.
10월 국영석유회사의 파업으로 국가 경제가 흔들렸으며, 11월 4∼5일 테헤란에서 샤의 하야를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대에 다시 총이 발사돼 유혈사태(검은 일요일)로 번졌다.
팔레비 왕정은 총으로 국민적 저항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정을 '불법 정권'으로 규정하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연설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고국으로 계속 보냈다. 12월 반정부 시위대는 200만명으로 늘어났다.
1979년이 시작되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왕정을 대신할 임시 통치 기구인 혁명회의를 구성하라고 지시, 사실상 국가 지도자로 역할 했다.
위기를 반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모하마드 레자 샤는 이듬해인 1979년 1월 16일 이란을 떠났다. 이후 그는 다시 귀국하지 못했다.
샤가 출국한 2주 뒤인 2월 1일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망명 생활 15년 만에 국민의 희망이 돼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타고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테헤란에는 수백만 명이 모여 그의 사진을 들고 환호를 질렀다.
열흘이 지난 2월 11일 마지막으로 버티던 군부가 중립을 선언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란에서는 매년 2월 1일이 되면 '파즈르(여명) 10일' 행사가 시작된다.
이는 '암흑의 왕정'을 민중의 힘으로 전복하고 세계 유일의 신정일치의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새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는 열흘이라는 뜻이다.

hska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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