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혁명 40년]③혁명의 유산과 유효기간(끝)

입력 2019-02-10 07:05  

[이란혁명 40년]③혁명의 유산과 유효기간(끝)
이란의 현주소…엄격한 사회체제·적대적 대미관계·혹독한 경제제재
"왕정 계속됐어도 달라진 것 없을 것"vs"혁명 옳았지만 현실 힘들다"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역사엔 가정법이 없다는 법칙은 40년 전 이란 이슬람혁명을 두고도 당연히 유효하다.
1979년 이슬람혁명이 실패하고 팔레비 왕정이 지금까지 유지됐다면 이란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졌을 테지만 그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란의 신정일치 체제를 비판하는 서방 학계와 언론은 혁명 이전 미니스커트를 입은 테헤란의 여대생 사진과 현재 검은색 차도르로 온몸을 가리고 거리를 다니는 이란 여성의 사진을 대조하곤 한다.
"이슬람혁명이 없었다면 이란은 자유와 인권이 넘치는 나라가 됐을 것이다"라는 점을 강력히 웅변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단순 대조는 직관적이긴 하지만 역사를 해석하는 위험한 방법일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의 결과가 부정적이라고 해서 사건의 선의까지 훼손하는 일은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는 편집과 선택, 확증편향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실제보다 미화돼 왜곡되기에 십상이다.
더욱이 40년 전 일반적인 이란 국민이 겪었던 경제, 인권적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다는 주장은 비밀경찰과 무력을 동원해 철권 통치했던 왕정의 실상과 극심했던 부의 양극화를 종합해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왕정을 전복한 1979년 이슬람혁명에 이란 국민이 대거 지지했다는 점은 사실로 인정되는 만큼 새로운 정치 체제를 갈구했던 혁명이 그 시절 이란의 시대정신이자, 최선이었다는 점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이란 국민은 샤(왕)가 아닌 신의 대리자로서 이슬람 법학자가 통치하는 신정일치의 새로운 나라를 맞이했다.
동시에 이란의 대외 관계도 급격히 소용돌이쳤다.
이슬람혁명 1년 전 이란의 샤는 테헤란을 찾은 미국 대통령(지미 카터)과 새해를 함께 맞이하며 건배했을 정도로 미국은 이란의 우방이었으나, 혁명 뒤 미국은 이란의 국부와 종교를 침탈하는 '대(大)사탄'이 됐다.
1979년 11월 주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444일간 외교관 등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잡은 사건으로 이란은 미국과 단교했다.
미 대사관을 점거한 급진파 이슬람주의 대학생들은 이곳을 '간첩의 소굴'이라고 불렀다.
세계 최강의 패권국 미국과 척을 진 대가는 혹독했다.
미국은 그 뒤 40년간 강력한 대이란 경제 제재로 이란을 압박했으며, 유럽은 물론 다른 우방국에도 이란과 적대적인 관계를 요구했다.
이슬람혁명 1년 뒤인 1980년부터 8년간 이어진 이라크와의 전쟁은 미국에 맞선 이란의 대리전이었다.
일부 역사가는 이라크와 전쟁이 없었다면 이란이 지금처럼 엄격한 이슬람 율법 통치 체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또 다른 '가정법'을 내놓기도 한다.
혁명이라는 급변 사태 직후 전쟁이 터지면서 이란 전반이 병영 국가가 됐고 경직됐다는 것이다.
40년 전 팔레비 왕정의 독재를 지지했던 미국은 현재 최고지도자를 정점으로 하는 이란 정권을 독재라면서 적대한다.

이슬람혁명이 40년이 지나면서 이란에서는 세대 간 균열이 조금씩 감지된다.
이슬람혁명은 여전히 이란의 '국시'이지만 혁명 이후 태어난 젊은 층이 8천만 인구의 절반을 넘으면서 그 강도가 희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변화다.
혁명을 주도했던 주역들은 하나씩 부고 기사의 당사자로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이란 국민은 물가 상승과 만성적인 고실업 등 일상의 고됨을 마주치고 있다.
혁명 40주년을 맞은 이란 국민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혁명은 옳았으나 현실이 힘든 것도 사실이다"라는 것이다.
테헤란에 사는 대학생 호세인(20)씨는 "이슬람혁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라며 "이슬람혁명의 정당성은 공감하지만 당장 젊은 층은 취직이 더 중요한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서방 언론은 이런 민생고를 이란의 이슬람 신정정권의 부패, 핵무기·탄도미사일 개발, 테러 지원과 같은 '불량 행동' 탓이라고 분석하지만 이란 정부는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미국의 경제 제재라고 맞선다.
테헤란 북부 타즈리시 시장에서 신발 장사를 하는 헤자리(68) 씨는 40년 전 거리에서 왕정을 타도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에 팔레비 왕정이 국민에게 변화를 약속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이란 국민은 모함마드 레자 팔레비(국왕)가 하루빨리 물러나길 바랐을 정도로 왕정이 끔찍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란 경제가 어렵지만 팔레비 왕정이 계속됐다고 해서 달라졌을 거라고 보진 않는다"며 "팔레비 시절이 좋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해서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혁명둥이' 회사원 어자리(40)씨는 "정치적 혁명은 시간이 지나면 정치인만의 문제가 되는 것 같다"며 "보통 서민들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먹고 사는 일, 자식 교육 같은 일을 걱정하면서 사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hska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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