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자 명동 일대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닷새간 장례 기간, 매서운 추위 속에 몇 시간을 기다려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만 40만명에 달했다.
평생 약자의 편에 서서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김 추기경의 마지막 길, 국민들은 종교와 이념을 초월해 한마음으로 애통해했다.
김 추기경 사진이 걸린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에서 선종 10주기를 앞두고 만난 허영엽 신부는 "장례를 준비한 저희도 많이 놀라고 당황할 정도로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고 말했다.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인 허 신부는 당시 장례위원회 대변인 역할을 했다.
허 신부는 "어두운 시대에 빛을 비추며 방향을 제시해주셨다"고 김 추기경이 국민적인 존경을 받은 이유를 설명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돌본 김 추기경은 불의에는 단호히 맞섰다.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 추상같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등 현대사 고비마다 양심의 목소리를 냈다.
허 신부는 "어두웠던 시절 세상이 추기경님에게 그런 역할을 원했고, 그렇게 해주신 추기경님은 그 시대에 필요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언젠가 추기경께서 개인적인 자리에서 내가 그렇게 나서는 성향이 아닌데 시대 상황상 해야 할 일이었다며 때로는 무섭고 두렵기도 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전했다.
늘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짐을 짊어지고 산 추기경의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종교를 넘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존경할 만한 큰 어른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념, 계층, 세대, 남녀 등 여러 갈등으로 한국 사회가 갈라지는 가운데 구심점이 될 지도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지도층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마지막 보루여야 할 종교계마저 신뢰를 잃으며 위기를 맞고 있다.
허 신부는 "어떤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지는 권위가 없어지는 것은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며 "다만 어느 자리에서든 각자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갈등이 극심한 이 시대에 김 추기경이 있다면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허 신부가 떠올린 답은 '서로 사랑하십시오, 만나십시오, 대화하십시오'이다.
그는 "추기경님은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말을 끊는 적이 없고 항상 먼저 듣고 말씀하셨다"며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모두 자기 이야기만 하는 지금 살아계신다면 귀를 막고 내 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진심으로 귀 기울여 대화하라고 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김 추기경은 북한 동포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한 방문도 여러 번 추진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허 신부는 "북한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는 안 된다며 많이 도우려 하셨다"며 "생전에 북한에 못 가셨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면 남북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도 역할을 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바보'라고 부르며 자신을 낮춘 김 추기경은 떠나는 순간까지 각막을 기증하며 사랑을 실천했다.
허 신부는 "추기경님이 항상 강조하신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며 "하느님은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주셨고,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까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김 추기경 선종 10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사업을 한다.
11일부터 명동성당 1898광장에서 추모 사진전이 열리고, 14일에는 명동성당 코스트홀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나눔 정신'을 주제로 심포지엄이 개최된다. 16일에는 선종 10주기 추모 미사가 봉헌된다. 17일과 18일에는 각각 토크콘서트 '내 기억 속의 김수환 추기경'과 선종 10주기 기념 음악회가 진행된다.
허 신부는 "중요한 것은 그분의 좋은 마음을 본받고 우리 것으로 삼고자 노력하는 것"이라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숙제"라고 말했다.
허 신부와 만난 회의실 한쪽 벽에는 김 추기경 사진과 함께 그가 1966년 주교품을 받으면서 설정한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문구가 걸려 있었다. 사목 표어를 한평생 실천한 김 추기경이 마지막까지 주위에 남긴 말도 '서로 사랑하며 살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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