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이 총독부 피해 지은 북향집 '심우장' 사적 된다

입력 2019-02-12 09:18  

한용운이 총독부 피해 지은 북향집 '심우장' 사적 된다
1933년 건립해 11년간 거주한 근대기 서울 한옥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중 한 명으로 기미 독립선언서를 읽은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1933년 직접 지어 194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1년간 거주한 집인 성북구 심우장(尋牛莊)이 사적이 된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유산의 문화재 지정과 등록을 추진하는 문화재청은 서울시 기념물 제7호인 '만해 한용운 심우장'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 예고한다고 12일 밝혔다.
조선시대에 메주를 쑤던 한양도성 인근 북정마을에 있는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소는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를 빗댄 말이다.
심우장은 전형적인 근대기 도시 한옥으로, 남향이 아닌 동북향으로 지은 점이 특징이다. 만해가 국권을 빼앗은 조선총독부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햇볕이 덜 드는 방향을 택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는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출가해 한국불교의 개혁을 주장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해 정교분리를 요구하고, 항일단체인 신간회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그는 54세이던 1933년 종로구 안국동 선학원 벽산 스님이 사둔 성북구 땅을 받아 손수 목공 일을 해 집을 세웠다.
이후 심우장은 민족지사와 문인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1937년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일송 김동삼이 순국하자 유해를 모셔와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심우장은 현재 정면 4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기와집 한 채가 남아 있다. 하지만 1952년 매각 당시 기록에 따르면 16㎡ 면적의 또 다른 건물이 있었다.
또 1962년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오늘날 존재하는 사랑채 앞쪽과 옆쪽 툇마루는 과거에 없었다. 기단부 아래에 설치한 석재도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우장은 한용운의 독립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점에서 문화재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전문가들은 "부속채 건물의 실체를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가능하다면 복원도 검토해야 한다"며 "본채 공간 구성은 근대 도시 한옥 중에서도 특이한데, 만해의 의지가 어떤 방식으로 반영됐는지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심우장이 사적으로 지정되면 등록문화재인 '구리 한용운 묘소'와 함께 독립정신을 기리는 뜻깊은 장소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심우장 사적 지정은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확정된다.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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