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선구자…경술국치 이전 의병투쟁으로 사형당해
후손들 중국·러시아·우즈베키스탄으로 흩어져 조국 보살핌 못 받아
(구미=연합뉴스) 박순기 기자 = 경술국치 이전인 1908년 의병투쟁으로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한 '독립운동의 선구자'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가 된 허위 선생의 형제와 많은 후손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항일 무장투쟁을 하다 희생됐다.
남은 일가붙이들은 불행하게도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해방된 조국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855년 경북 구미 임은동에서 학자 집안의 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허 선생은 당대 성리학의 거물 중 한 명이었던 맏형 허훈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허훈은 19세 아래인 동생 위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학문에서는 아우에게 양보할 게 없지만, 포부와 경륜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며 동생의 범상치 않음을 꿰뚫어 봤다고 한다.
허위 선생은 39세인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화란(禍亂)을 피해 경북 청송군 진보면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10월 명성황후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에 항거하다가 41세 때인 1896년 3월 경북 김천 장날에 항일의병 기치를 들었다.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됐다.
의병은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 뒤 직지사에서 포군(砲軍) 100여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충북 진천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고종의 밀서에 따라 의병을 해산했다. 허위는 이때의 답답한 심정을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보국하려던 서생이 철갑을 벗는다/ 산새는 시국 급할 줄은 모르고/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不如歸)라 하네"라고 읊었다.
그는 청송군 진보에 있는 맏형에게 돌아와 3년간 학문을 닦다가 1899년 중앙 관계로 진출해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왕명의 출납과 병기·군정 등의 일을 맡아본 관청의 관직), 평리원(대한제국의 사법기관) 수반판사,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임금을 보좌해 정무를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기관) 참찬(정2품 관직)에 이어 1905년 비서원(왕명의 출납·기록을 담당하던 관청) 승(현 대통령 비서실장·종3품)을 역임했다.
재직 때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해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일제는 1904년 2월 한국침략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 조인했다.
허위 선생이 전국에 배일 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자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선생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은거 중이던 1905년 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는 등 국권이 완전히 기울었다.
선생은 전국을 돌며 의병을 모집하다가 1907년 9월 연천·적성·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해 11월에는 선생의 휘하 의병부대와 이인영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이 조직됐다.
이인영이 총대장, 선생은 작전참모장 격인 군사장(軍師將)을 맡았다.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전국에서 1만여명의 의병을 경기도 양주로 집결시켰다.
서울 진공의 선공을 맡은 선생은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1908년 1월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했다.
그러나 후발 본진의 이인영 총대장이 부친 타계 소식을 듣고 경북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고 서울 진공 정보까지 누설됐다.
허위 선생의 선발대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대비하던 일본군 공격을 받았고, 작전은 실패했다.
이후 선생은 경기 북부지방에서 의병운동을 계속하다가 1908년 6월 은신처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는데, 당시 나이 53세였다.
왜승이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 하자 선생은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라고 대성 일갈하며 물리쳤다고 한다.
또 검사가 시신을 거둘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죽은 뒤의 염시를 어째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답했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거사 후 법정에서 허위 선생을 평하기를 "우리 2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침),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굴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허위는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했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허위 선생의 셋째 형 허겸 등은 일가를 이끌고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북만주 이역의 하늘 아래 뼈를 묻었다. 후손들은 국제 미아로 살고 있다.
김종길 구미근현대사연구모임 대표는 "허위 가문은 명문의 전통과 영화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위해 바쳤다"며 "혹자는 '집안의 슬픈 이야기'라고 한탄하지만,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했다.
정부는 허위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독립 유공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서울시는 1966년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 구간을 왕산로로 제정했다.
2009년 9월 허위 선생의 생가 부근에는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지하 1층·지상 2층, 1천950㎡)이 개관하고, 기념관에서 500여m 떨어진 생가터에는 기념공원(1천990㎡)이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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