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⑥유관순 거사 천안 아우내장터

입력 2019-02-22 06:00  

[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⑥유관순 거사 천안 아우내장터
조선의 잔 다르크·구국의 소녀, 3·1운동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옥중에서도 만세운동…갖은 고문 끝에 18세 순국




(천안=연합뉴스) 이은중 기자 = '조선의 잔 다르크' '구국의 소녀' 등 3·1 독립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유관순 열사를 지칭하는 말은 참 많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긴 유관순 열사.
18세 꽃다운 나이로 일제 탄압에 항거하며 순국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행적은 그의 고향인 충남 천안 병천에 잘 남겨져 있다.
◇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충남 천안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9년 3·1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그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에 친구 몇 명과 함께 합류했다. 이어 3월 5일에는 서울역 앞에서 제2차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선배의 지시에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모을 돈이 없었다. 이에 마을 어른들과 직접 만세운동을 벌이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4월 1일 아우내 장날 거사를 벌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3월 31일에는 사전계획에 따라 마을 주변 매봉산 정상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것을 알리는 횃불을 밝혔다.
거사 당일에는 3천여명의 장꾼이 모인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시위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명이 다쳤다. 유관순 열사는 시위 후 박종환의 집에서 2∼3일 숨어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빠져나오다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징역 5년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유관순 열사는 "삼천리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라며 고등법원의 상고를 포기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 계속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아서는 감옥에서 다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 갖은 고문을 받다 방광이 파열돼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이때 그의 나이 만 18세였다.
정부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혼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100년 전 만세 함성이 들리는 듯…아우내장터
'아우내'란 백천천과 광기천이 합수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아우내는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길목에 있어 조선 후기 오일장이 개설돼 물류의 집산지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1일과 6일 등 5일을 주기로 장날이 찾아오면 각종 토산물과 일용잡화가 아우내장에서 거래된다.
장터 주변에는 명물인 병천순대와 순대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30여곳의 식당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지금은 병천순대가 별미로 입소문을 타면서 주말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변했다.
2009년에는 장터 초입에 독립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사실을 알려주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면적 4천430㎡)이 조성됐다.


◇ 생가지·봉화지·초혼묘·기념관…유관순 열사 사적지
아우내장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탑원리에는 봉화대와 초혼묘(招魂墓·유골이 없는 분의 혼백을 모신 묘), 추모각, 기념관이, 산 넘어 용두리에는 생가지(生家址)가 있다.
생가지는 봉화지와 함께 1972년 10월 사적 제230호로 지정됐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일본 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 12월 복원한 것이다.
생가 작은 방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앉아 거사를 도모하고 태극기를 손수 만드는 모습을 인형으로 재연해 놓았다.
생가 옆에는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그의 부모는 자녀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 따라 그는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장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4월 1일 아우내장터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불을 피웠던 봉화지는 매봉산(해발 210m) 정상에 있다. 매봉산은 천안시의 남동쪽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당시 그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연기, 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타올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이 세워졌다.
천안시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매년 2월 마지막 날 이곳에서 유관순 열사와 만세운동을 기념하고자 아우내 봉화제를 연다.
이 행사는 1978년 봉화제를 올린 것이 시초가 됐다. 그 뒤 2005년부터 봉화 횃불을 재연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매봉산을 오르다 보면 중턱에 유관순 열사 초혼묘가 있다. 1989년 10월 12일 유관순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봉안한 것이다.
초혼묘와 봉화탑으로 오르다 보면 등산로 곳곳에 대리석으로 그를 추모하는 시와 글이 적혀 있다.


열사의 시신은 옥사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인계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정동교회에서 간략한 장례의식이 거행된 뒤 그의 육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묘지는 일제의 도시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기념관은 열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호적등본,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과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서대문형무소 벽관체험 코너 등을 갖추고 2003년 4월 개관했다.
사적지 맨 위쪽의 추모각 열사의 영정 앞에서는 해마다 순국일(9월 28일)에 맞춰 추모제가 열린다.



유관순 열사에게는 현재 정부의 서훈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돼 있지만 3·1독립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공적에 맞게 상훈을 격상해야 한다는 서명운동이 그의 고향인 천안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류정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은 "유관순 열사가 받은 서훈은 김도현, 김마리아 등 823명 중 한 사람일 뿐"이라며 "일본의 재판권을 거부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어 3·1운동의 꽃이요, 민족의 누나로 추앙받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서훈등급이 3등급이라는 것은 열사의 활동과 정신을 되새기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ju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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