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항일 독립운동 속의 여성들' 주제로 한 심포지엄 개최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3·1운동 100주년이 사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광주·전남에서 활동한 여성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사단법인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회는 26일 '광주·전남 항일 독립운동 속의 여성들'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명진 광주전남지회장의 발제문에 따르면 1919년과 1921년 두 차례 이뤄진 목포 만세운동에는 정명여학교가 참여했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교장 김아각 목사에게 독립선언서와 2·8독립선언서 사본, 결의문 등을 전달받아 비밀스럽게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결국 이 일을 주도한 최자혜 선생을 비롯해 다수의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학교 일정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학생이 잡혀가 학교는 임시 휴교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
두 번째 만세운동은 1921년 11월 14일 천귀례 선생 등 정명학교 학생 12명이 주도했다.
신문을 통해 워싱턴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이 세계에 조선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거행한 만세 운동이었다.
명 지회장은 "여학생들이 신문에 보도된 국제 정세와 외교사안을 판단하고 이를 활용해 항일 운동을 조직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며 "일제의 비인도적인 탄압을 스스로 극복했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항일 운동은 더욱 투철했다"고 설명했다.
명 지회장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비밀결사 '소녀회'에도 주목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방향을 바꾼 일제에 맞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 장매성·박옥련 선생 등의 주도한 비밀 독서모임이었다.
12명의 소녀회 회원들은 매달 10전씩 회비를 내 사회과학 서적 등을 보며 연구와 토론을 했고,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
이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존재를 알게 된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혀 징역 2년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 등을 선고받고 퇴학당했다가 1954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백지동맹을 주도한 것도 광주여고보생이었다.
백지동맹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구속된 학우들을 풀어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 중간고사를 백지로 제출할 것을 결의한 사건이다.
백지동맹을 주도한 당시 광주여고보 최순덕 선생은 평소 알고 지내던 광주고보생 이경채 선생에게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하자는 제안을 받고 비밀모임에 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최 선생은 전교생이 여기에 동조하도록 호소문 초안을 비밀모임에서 작성한 뒤 같은 반 친구의 집으로 가져가 150여장을 밤새워 작성했다.
결국 1929년 11월 11일 광주여고보 전체 학생은 중간고사 시험을 거부하고 운동장에 모여 "시험지에 한 글자도 쓰지 말자", "구속 학생들이 석방될 때까지 시험을 거부하자" 등을 외치며 농성했다.
이 사건으로 최 선생은 퇴학 처분을 받았다가 이후에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수피아여고에는 1930년께 '백청단'이 조직됐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암호를 새긴 은가락지를 끼고 서로가 한 단원이라는 점을 표시했다.
항상 태극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에게 태극기의 설명을 하고 글을 가르쳤다.
백청단은 단원 중 한 학생이 가택수색을 당하면서 일기장이 발견돼 회원 18명이 기소유예를 당했고, 이 일로 학교는 무기휴학에 들어가게 됐다.
명 지회장은 "여성은 당시 남성 중심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동등한 역할을 하면서 기꺼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며 "3·1혁명이 전국으로 확산해 나가는데 여학생들의 활약이 큰 동력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전남대 이경순 명예교수는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고, 홍인화 전 광주시의원은 수피아여학교를 중심으로 한 광주 3·1운동에 대해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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