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이섬에 한국 농업기술 전수, 푸드터미널 건립해 유통정비
농촌 환경개선-생산 증진-유통기반 확충으로 선순환 농촌개발
(파나이=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우리는 더는 농부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농업기업가라고 불러주세요."
필리핀 7천여개 섬 가운데 6번째로 큰 파나이섬에 사는 농부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소작농이나 빈농으로 살며 자급자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들이 코이카의 도움으로 '부농'의 꿈을 꾸게 됐기 때문이다.
코이카는 지난 2015년부터 올해까지 국립한경대와 협력해 650만 달러(약 73억원)를 들여 파나이섬 4개 주의 고산지대 10곳에서 지속가능한 농촌개발 체제 구축 사업을 벌여왔다. 주거·위생 등 농촌 환경개선부터 시작해 우량 종자·선진 농법·기계화를 도입해 생산량을 늘렸고 마지막 3단계로 유통시스템과 금융체제를 만드는 일을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농민 2만여 명이 단순 '생산자'에서 '기업가'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자는 취지다.
코이카는 '농장부터 식탁까지(Farm to Table)' 유통망 구축을 위해 열악한 산악지역에 150~250㎡ 규모의 농산물 집하장 10동을 짓고, 각 군에 2.5∼4톤 트럭과 유통 기자재를 무상 제공했다.
지난 1∼2일 파나이섬 최대 도시 일로일로의 로빈슨 몰에서는 그동안의 성과를 선보이는 '로컬푸드 트레이드 쇼'가 열렸다. 10개 사업대상지 농민들은 코이카의 도움으로 개발한 각종 채소와 과일, 뿌리작물 등 지역 특산물과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소개하고 판매하는 부스를 운영했다.
이들은 "대를 이어온 가난의 사슬을 끊을 기회가 생겨 감격스럽다. 수십년간 농사를 지어왔지만 요즘처럼 신난 적이 없다"며 기뻐했다.
알리모디안 지역에서 쌀과 당근 농사를 지어온 벌지 알다만 씨는 "그동안 민간 기업에서 월 10%의 이자를 주고 작물 종자를 사다보니 수확 후 남는 게 별로 없었다"며 "프로젝트 덕분에 마을 조합도 생겨 저렴하게 종자를 얻게 됐고, 유통비도 줄일 수 있게 돼 올해는 이익이 예상된다"고 했다.
이익이 나면 전부 아이들 교육비로 쓰겠다는 하민단 지역에서 온 레메디오스 라넬료 씨는 "보잘것없는 일을 한다는 자괴감에서 친환경 농산물로 사람들의 먹거리를 책임진다는 긍지가 생겼다"고 즐거워했다.
코이카는 3단계 사업이 완료되고 본격적으로 시너지를 내게 되면 중간 상인만 이득을 보던 후진적 유통구조도 개선돼 생산자는 기존보다 100% 오른 금액으로 작물을 팔 수 있고 소비자는 50% 저렴하게 구매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트레이드 쇼에 앞서 1일 오전에는 파나이섬 산미구엘 군 소재 파나이 유통센터에서 코이카에서 지어준 로컬푸드터미널과 로컬푸드센터 기증식도 열렸다.
560㎡ 규모의 로컬푸드터미널은 파나이섬 고지대 11개 군의 농산물집하장 10동에 모인 농산물을 각 수요처로 효과적으로 유통하기 위한 허브이자, 섬 전체의 농산물 유통정보를 공유하는 허브로서 기능하게 된다.
터미널은 파나이 처음으로 태양열 에너지를 활용한 냉장저장창고를 갖추고 있어 농작물이 소비자에게 전달되기 전까지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 시장의 수요와 공급 현황에 따라 좋은 가격으로 판매도 가능해질 수 있다.
2층 규모의 로컬푸드센터는 농민들의 유통역량 강화 교육과 비즈니스 미팅 장소 등으로 활용된다. 이번에 기증된 건물과 기자재 소유권은 군청이, 운영은 농민조직 또는 협동조합 등 민간에서 맡는다.
토비아스 지역에서 온 로세니오 클라리토 씨는 "코이카가 기증한 트럭 덕분에 중간 상인의 마진 없이 바로 농작물을 로컬푸드터미널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유통비용을 절감하고 소득도 높이게 됐다"며 "이런 꿈 같은 일이 현실화할 리 없다면서 사업에 참여 안 했던 이웃 마을로부터 잔뜩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소개했다.
클라리토 씨는 "긴가민가하며 참여했던 주민들이 이제는 파나이 제일의 부촌을 만들자고 합심하고 있다"고 밝게 웃었다.
코이카는 파나이의 청정 농산물 이미지를 반영한 로컬푸드 브랜드화를 위해 공동로고를 개발하고, 농산물의 포장재, 사업 관련 시설 및 기자재 표시에 활용해 브랜드 마케팅도 지원했다.
로컬푸드 구매 확산을 위해 '로컬푸드 육성 신탁기금'을 조성하여 로컬푸드를 구매하고자 하는 법인 또는 개인(유통 파트너, 농민조합, 시장연합회, 농민, 시장상인 등)에게 금융지원도 병행하고 있다.
행사에 참석한 임마누엘 판틴 피뇰 필리핀 농업부 차관은 "농어촌 지역 빈곤 문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구조적으로 농민들이 금융이나 시장에 직접 접근할 수 없어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것"이라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지 모범답안을 제시해 준 코이카에 감사하다. 파이나 섬 농촌개발 사례를 필리핀 전역에 확산하도록 힘쓸 것"이라고 반겼다.
필리핀은 한반도의 1.3배인 국토면적을 가졌지만 산악지형이 많아 농업 면적은 전 국토의 44.5%에 그치고 있다.
농업에 많은 인구가 종사하나 소농장 위주의 소작농과 빈농들이라 필리핀 빈곤층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서 농촌개발은 빈곤 감소를 위한 최우선 과제였다.
이미경 코이카 이사장은 "이번 프로젝트는 농민 의식개혁부터 시작해 자립과 성장의 발판을 만들어 준 후 유통과 금융도 연결해 지속가능한 가치사슬을 만들어 준 게 최대 성과지만 무엇보다도 필리핀 고유의 바야니안(함께 일하는 공동체 문화)을 살려 마을 부흥을 끌어낸 점"이라며 "필리핀 농업부에서도 농촌개발의 모델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만큼 이번 사업이 필리핀에 제도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필리핀 농업부로부터 해외 원조기관이 필리핀 내에서 진행하는 24개 ODA 가운데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wakar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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