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번 구운 빵 20여분만에 동나…공교육도 선생 없어 사실상 마비
커피 9잔 가격이 한달 최저임금…"예전보다 더 일하지만 밥 더 못 먹어"
(카라카스=연합뉴스) 국기헌 특파원 = "모든 것이 다 망가졌어요"
지난 5일(현지시간) 오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외곽에 자리 잡은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한 흐린 하늘 아래 비행기 트랩에서 공항 건물로 가는 순환 버스를 기다리던 한 40대 건축가는 베네수엘라 상황을 묻자 고민 없이 바로 이런 대답을 내놨다.
축제 연휴를 맞아 파나마 수도 파나마시티에 있는 형제 집에 갔다가 귀국하던 그의 손에는 치약과 기저귀 등 생필품이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경제난으로 베네수엘라인들이 겪는 곤궁한 삶의 무게가 불현듯 다가왔다.
차로 40분 남짓 걸려 진입한 시내에는 어느덧 어둠이 깔렸다. 축제 연휴 마지막 날이라 시민과 차량의 왕래가 거의 없는 탓에 카라카스는 마치 '죽음의 도시'처럼 스산한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전직 경찰 출신으로 공항에 마중나온 곤살레스 프랑클린(47)은 "지인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 비용으로 500달러가 든다"면서 "월 최저임금을 받는 대다수 서민은 사랑하는 가족의 가는 길도 사람답게 대접하지 못한다"고 푸념했다.
공무원을 비롯해 많은 베네수엘라인은 월 1만8천 볼리바르인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암시장 외환 거래의 지표 역할을 하는 달러투데이닷컴에 게시된 달러당 환율이 최근 3천200볼리바르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가치가 6달러가 채 못 되는 금액이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살인적인 물가상승은 서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시내에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파는 밀크커피 가격이 약 2천 볼리바르라 9잔만 마시면 한 달 치 최저임금을 다 써버린다. 또 월 최저임금으로는 흔히 먹는 계란을 한판 반가량 살 수 있다고 한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한 식당의 종업원 캘비스 바리오스(27)는 "예전보다 일을 더 하지만 오히려 밥은 더 못 먹고 있다"면서 "과거에는 최저임금으로 교통비, 학비 등을 내고 외식도 몇 번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최근 아끼던 차를 팔았다"면서 "닭 한 마리를 사려면 월급의 절반을, 쇠고기 1.5㎏을 사려면 한 달 급여를 써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지난 1월 23일 임시 대통령 선언을 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지지한다고 밝힌 다른 종업원 미겔 앙헬 파티오(19)는 "경제가 완전히 망가졌다"면서 "우리는 날마다 생존을 위한 갈림길에 서 있다. 그래서 변화를 원한다"고 힘줘 말했다.
요즘 베네수엘라의 대표 길거리 음식으로 옥수숫가루를 기름에 튀겨 만드는 아리나 빵 가판 상인도 기름이 부족한 탓에 찾아보기 힘들다. 서민이 감내하기 힘든 물가상승에 더해 생필품난에 허덕이는 현실이 일상화된 모습이다.
6일 오후 찾은 서민층 주거지역인 칸델라리아에 있는 한 제과점에서는 생필품난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베네수엘라인들의 기초식품에 해당하는 캄페시노 빵이 구워지자마자 20여분 만에 동이 났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캄페시노 가격은 1천 볼리바르로, 18개를 사면 한 달 치 최저임금이다. 중산층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캄페시노가 2천 볼리바르에 팔린다.
제과점 주인은 "밀가루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하루에 2번 빵을 구워 파는데 금세 다 팔린다"면서 "밀가루 가격이 올라 내일부터 캄페시노 가격을 1천500볼리바르로 올릴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경제난 속에 공교육도 사실상 무너졌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빵이 판매되는 시간에 맞춰 제과점을 어머니와 함께 찾은 루이스 다빗모란(17)은 "작년에 돈이 없어 학교를 1년간 쉬었다가 복학했다"면서 "학교에 가지만 선생님들이 없어 시간만 보내고 하교한다"고 털어놨다.
지금까지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한 마두로 정권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각종 복지정책의 혜택을 보는 빈곤층의 지지 덕분이었다. 대표적인 정책은 클랍(CLAP)으로 정부가 빈민층에게 설탕, 파스타, 분유 등과 같은 기초식품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로이터 통신은 작년 기준으로 약 600만 가구가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 것으로 추산한다.
클랍은 무상 주택 제공 프로그램인 '그란 미시온 비비엔다(GMVV)', 무상 의료 서비스 등과 함께 마두로 정권을 지탱하는 빈곤층의 지지를 유인하는 최후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총체적인 위기 속에 베네수엘라인들 사이에서는 '생존'을 위한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과이도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 선언을 한 뒤 이어지는 반정부 시위에 서민은 물론 빈곤층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변화는 구도심으로 우파 야권이 장악한 국회와 국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마두로 정권이 2017년 출범시킨 제헌의회, 중앙은행, 관공서 등이 밀집해 있는 시몬 볼리바르 광장 주변에서 무작위로 만난 시민들을 통해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보석 세공사인 조하나 멘도사(44)는 "예전에는 시몬 볼리바를 광장 주변에 관광객이 넘쳐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아름다웠던 옛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직 재정부 공무원 출신으로 30년을 일했다는 올란도 가파엘 실베라(66)는 공무원으로 재직 때 실직 위협 탓에 감췄던 속내를 은퇴하고서야 솔직히 드러냈다. 그는 "연금을 받아 생활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지금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게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통상 베네수엘라 공무원은 친정부 집회에 자주 동원되며 마두로 정권의 지지층으로 분류된다.
최근 들어 마두로 대통령을 '마부로'(Maburro)로 부르는 조롱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마부로는 마두로(Maduro)와 당나귀를 뜻하는 스페인어 부로(burro)의 합성어다.
우파 야권이 장악한 국회 의사당 건물로부터 50m가량 떨어진 제헌의회 건물 옆에 마련된 천막 안에서는 노인 10여명이 정부 홍보물을 시청하기도 했다. 천막 겉에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베네수엘라를 존중하라'는 내용의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국회 앞 건물 곳곳에는 '나는 대통령이다. 2019년 1월 10일'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홍보물이 곳곳에 내걸렸다.
베네수엘라의 독립영웅인 시몬 볼리바르 생가를 관람하던 한 시민은 "마두로가 자신을 홍보하는 것은 그만큼 정통성에 자신이 없다는 증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penpia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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