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뭉치 대신 카드 사용으로 금융 투명성 제고…고기보다 싼 야채 선호
잦은 정전·시위 등으로 도보 이동 증가…비닐봉지 사용도 줄어
(카라카스=연합뉴스) 국기헌 특파원 = 지난 7일(현지시간) 오후 5시께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도심 인도에 갑자기 인파가 몰렸다.
카라카스를 비롯해 전국을 강타한 정전 탓에 퇴근길에 나선 시민들이 전철 등을 이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길거리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간혹 보이는 버스는 퇴근하는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가득 찼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바람에 카라카스 시내에 있는 모든 신호등이 꺼졌고, 교차로마다 뒤엉킨 차량 탓에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판매업에 종사하는 루사르는 "직장에서 집까지 2시간 걸린다. 어두워지면 강도 등을 만날 수 있으니 해가 떠 있을 때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전이 8일에도 계속되자 이날 오전 6시부터 출근하려고 일찌감치 집을 떠난 시민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베네수엘라를 뒤덮은 경제난이 국민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식품과 기초 생필품, 의약품 부족으로 많은 국민의 삶이 곤궁해졌지만 금융, 환경, 식습관 등 일부 측면에서는 경제위기가 아이러니하게 '전화위복' 같은 변화상도 동반했다.
우선 살인적인 물가상승률로 사실상 휴짓조각이 된 볼리바르화 탓에 금융 투명성이 높아지고 온라인 금융 거래가 활발해졌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로 인해 시장이나 마켓에서 장을 보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으려면 돈뭉치를 들고 다녀야 한다.
고기 1㎏을 사려면 상자에 돈을 넣어가야 할 정도로 현재의 화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지난해 8월 볼리바르를 10만대 1로 액면 절하하는 등 물가상승에 대처하기 위한 땜질식 처방을 내놨지만 추락하는 화폐 가치 하락을 막지 못했다.
심지어 화폐 발행 비용이 실질적인 유통 가치를 상회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되자 현금 대신 카드를 사용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있다.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사 먹으면서 카드로 결제하는 모습을 쉽지 않게 볼 수 있다.
식당 등지에서 봉사료를 지급할 때도 카드로 결제한다.
베네수엘라에서 20년째 산 한 교민은 "최근 마트에서 물건을 산 뒤 짐을 옮겨주는 종업원에게 줄 소액 현금이 없어 난감한 적이 있다"면서 "종업원에게 계좌번호를 물어봐서 나중에 송금했다"고 귀띔했다.
대중교통 운행이 줄고 잦은 정전과 시위 등으로 도보로 이동하는 일도 잦아졌다.
유지보수를 위한 부품 수입이 거의 이뤄지지 않으면서 버스 운행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간혹 정전되거나 시위가 일어나면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되므로 출퇴근하거나 업무를 보려면 걸을 수밖에 없다.
마트 종업원인 가브리엘라 푸리에토는 "주 6일 근무하는데 매일 45분씩 걸어 출퇴근한다"면서 "교통편이 많지 않은 가운데 도보로 돈을 아끼고 건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푸에리토는 카라카스 동부 빈민층 지역인 페타레에서 살고 있다.
식습관도 변했다.
베네수엘라인들은 과거에 고기 등 육식과 기름에 튀긴 음식 등을 즐겨 먹었지만 지금은 상대적으로 값싸고 국내서 조달 가능한 야채를 많이 먹는다.
시장을 찾은 파비올라 베니아는 "물가가 너무 가파르게 올라 힘들다"면서 "적은 돈으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외국서 수입하는 설탕 역시 공급이 줄면서 소비량이 급감했다.
많은 시민이 식당과 커피숍 등지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공짜로 나오는 설탕 봉지를 습관적으로 호주머니에 챙긴다.
집에서 음식을 요리하면서 사용하기 위해서다.
'마두로 다이어트'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 굶는 국민이 많아졌지만 상대적으로 식습관은 건강에 유익한 방향으로 변한 셈이다.
수크레 구청에서 일하는 카르멘 크루소는 "식품과 생필품 부족 등 우리가 지금 겪는 경제난은 석유 자원 부국인 우리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미국이 꾸민 경제전쟁 탓"이라면서 "최저임금으로도 돈을 절약하면 현재의 어려움을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비닐봉지와 일회용품 사용도 급감해 환경 보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 물건을 사면 거저 주던 비닐봉지가 원료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현재 유료로 전환됐다.
일회용품 역시 가격이 비싸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국민이 사용을 자제한다.
유기농 재배도 늘었다.
수입에 의존하는 비료와 농약이 비싸기 때문에 농작물 재배에 거의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다.
penpia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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