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기행] 진한 사투리에 양념 팍팍…'소울푸드' 밀양 돼지국밥

입력 2019-04-09 08:01  

[음식기행] 진한 사투리에 양념 팍팍…'소울푸드' 밀양 돼지국밥

(밀양=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밀양이 부산만큼 돼지국밥으로 이름난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밀양 사람들은 오히려 밀양이 돼지국밥의 원조라고 말한다. 지금의 부산 돼지국밥이 밀양에서 건너갔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한번 다녀와 봤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밀양을 다녀올 수 있도록.

◇ 밀양의 돼지국밥



인구가 10만 명에 불과한 밀양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돼지국밥집이 있었다.
밀양농업기술센터가 파악한, 영업신고가 된 돼지국밥집은 모두 64곳. 밀양 돼지국밥집의 특징은 나름대로 조리법이 있어 맛도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유명한 식당들도 많다. 가장 오래된 곳은 80년 전통을 자랑한다. 돼지머리와 갖가지 뼈를 넣어 가마솥에 몇 시간씩 고아서 우려낸 전통 돼지국밥부터 족발과 수육에 걸쭉한 국물을 활용한 퓨전 돼지국밥까지 다양하다.
밀양 돼지국밥의 유래는 문헌에서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으나, 밀양의 지리적 특성과 농경문화에서 대략 유추된다. 현재 돼지국밥의 모습이 갖춰지기 전에는 돼지고기 삶은 물에 고기 몇점을 넣고 밥을 말아 먹는 식이었다.



밀양에서 돼지국밥을 즐겨 먹게 된 연유를 보자.
첫째, 밀양은 낙동강과 그 지천을 중심으로 한 비옥한 토지가 자랑인 고장이었다. 농경문화의 발달로 농산물의 부산물을 활용한 축산업이 발달했다. 예로부터 농사를 짓는 데 중장비와 같은 역할을 한 소는 함부로 잡지 못했다. 반면 돼지는 일반인들도 도축이 가능해 식재료로 널리 활용됐다. 이는 돼지고기를 활용한 음식문화의 발달로 이어졌다.
둘째, 밀양은 14세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존재했던 한성에서 동래까지 이어지는 주도로인 영남대로(嶺南大路)와 낙동강 뱃길이 경유하는 교통과 문화교류의 중심지였다. 이에 따라 여행자들이 간편하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으면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인 국밥이 발달하게 됐다.
셋째, 따뜻한 기후적 특성 덕분에 방아잎이나 산초, 들깻잎 등을 식재료로 많이 활용하는 남부지방 특유의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이러한 향신료들이 돼지의 잡내를 없애고 국밥의 맛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 '닥치기 할매집' 예림 돼지국밥



누구나 가난했던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밀양에서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한결같이 '닥치기 할매'를 기억한다.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다 해내는 억척스러운 할머니였기에 그같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상남면의 닥치기할매가 돼지국밥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전이다. 전쟁이 터진 뒤 전선은 인근 창녕까지 밀렸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근처의 예림초등학교에 야전병원이 들어서면서 닥치기할매의 국밥집은 환자와 가족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후 할매는 노환으로 거동이 어렵게 됐고 며느리였던 최양숙 씨가 가업을 이어왔지만 1972년 일손 부족으로 식당은 문을 닫았다.
끊겼던 돼지국밥의 전통은 1997년 외환위기 때 부활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세가 기울자 최씨의 며느리인 윤경희 씨가 1997년 다시 국밥집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윤씨는 지금까지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 집 국밥 맛의 비결은 모든 돼지고기 손질을 식당 내에서 한다는 것이다. 다른 국밥집에 비교해 월등히 넓은 식당 부지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국물은 장작불을 이용해 옛날 방식대로 진하게 우려낸다.



◇ 밀양 돼지국밥의 원조 동부식육식당

시내와 거리가 꽤 먼 무안면에 자리 잡은 식당이지만 이곳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곳이 밀양 돼지국밥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삼형제가 선대의 가업을 이어받아 동부식육식당 등 무안면에서 각기 다른 돼지국밥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 삼형제의 식당은 모두 80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한다.
동부식육식당의 최수곤 사장은 "원래는 돼지국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며 돼지고기를 삶은 물을 '전국'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거기에 고기와 밥을 조금씩 넣어 팔았는데 그것이 돼지국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돼지국밥은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진화를 거듭했다. 최 사장은 깔끔한 국물맛을 낼 방법을 고민하다, 우골(牛骨)을 삶아 낸 육수를 개발해 냈고, 그것이 이 집의 특징이 됐다.
지금도 주말이면 400∼500그릇이 팔릴 만큼 인기가 높다.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은 뚝배기에 밥을 말아서 내주는 전통적인 돼지국밥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미리 국그릇에 밥을 담가놨다가 뜨거운 국물을 여러분 부어 뜨끈하게 만들어 서비스한다. 물론 따로국밥 메뉴도 있다. 기름기가 없는 이 집 국물은 맑고 투명하다.



◇ 밀양역 앞의 '소울푸드' 밀양 돼지국밥

봄비 내리는 밀양역 앞에 내려 렌터카 예약 시간을 기다리다 출출해서 들어가 본 곳이다.
주인 류재현 씨는 친누나로부터 가게를 이어받아 16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영업해 오고 있다.
내로라하는 밀양의 돼지국밥집들을 제치고 이 식당을 올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10년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이 식당을 찾아 한 끼를 해결하는 문모(82) 노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들어서자마자 식당 맨 앞 구석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문 노인에게 돼지국밥 한 그릇이 배달된다. 주문할 필요가 없다. 문 노인의 메뉴는 항상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친구들도 다 죽고, 요즘은 너무 외롭다"는 문 노인은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여 한술씩 떴다.
다른 국밥집은 입맛에 안 맞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에 꼭 한 번씩 이 식당을 찾아 끼니를 해결한다고 한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른바 '소울푸드'라는 말은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 할아버지에게 더욱 어울리는 단어인 듯하다.
주인장이 자랑하는 메뉴는 전통적인 돼지국밥 이외에도 카레 가루가 들어가 있는 순대국밥이다.
칼칼한 맛의 순대국밥을 한번 맛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이 집은 정구지(부추의 경상도 사투리) 무침이 함께 나온다.

◇ '시장통의 구수한 인심' 돼지국밥 단골집



밀양 전통시장 안쪽 골목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미로와 같다. 이런 복잡한 통로 한곳에 '돼지국밥 단골집' 간판이 보인다. 이곳도 80년이 넘는 가게 연혁을 자랑하는 곳이다.
딸 윤말애 씨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정화자 할머니는 시어머니로부터 돼지국밥 조리법을 전수해 50년 넘게 밀양 돼지국밥을 만들어 오고 있다.
정씨의 시어머니는 한국전쟁 전부터 돼지국밥집을 하셨다 한다.
이 집 돼지국밥은 국물이 맑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방아잎을 제공한다. 독특하고 쏘는 맛이 돼지고기 잡내를 없애주는 장점이 있지만, 향이 강해 처음 먹는 사람은 방아잎을 소화하기가 쉽지는 않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polpor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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