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의 시를 입은 딱지본 소설…'슬프다 풀 끗혜 이슬'

입력 2019-03-13 16:35  

송재학의 시를 입은 딱지본 소설…'슬프다 풀 끗혜 이슬'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알록달록한 딱지본 옥중화이다 50년 전부터 할머니였던 외할머니가 금호 장터에서 사 온 1960년대 향민사 춘향전을 이모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읽어주어야만 했다 책 읽어주는 전기수 이모의 심사가 사나워지려 하니 외할머니의 조급증이 귀한 계란탕을 내었다 (…) 이혈룡을 도와준 기생 옥단춘을 알기까지 외할머니는 내내 춘향이 화급한 마음이다 춘향이 수절이야 앞산 뒷산 쑥국새들도 잊지 못하고 지지쑥꾹 되풀이하지만 상수리나무 잎들도 얼룩덜룩 초록물을 뱉었다'('딱지본 언문 춘향전' 부분)
등단 33년째를 맞이한 송재학 시인이 열번째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글자의 생김새부터 낯설게 느껴지는 이번 시집의 제목은 1935년 세창서관에서 발간된 딱지본 '미남자의 루'에 수록된 옛 소설의 제목을 가져온 것이다.
시인은 총 3부로 나뉜 이번 시집에서 3부 13편의 시를 딱지본 소설을 바탕으로 썼다.
딱지본 소설은 1910년부터 신식 활판 인쇄기로 찍어 발행한 통속적인 내용의 국문소설로, 주로 노동자나 농민이 읽었다.
하급 문화에 속해 그동안 학계에서도 외면받았지만, 송 시인은 "딱지본에 미학적으로 이끌려서 시를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13일 연합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외할머니 때문에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딱지본을 접했는데 몇 년 전에 우연히 다시 접하게 되면서 시적 소재로 삼게 됐다"고 전했다.
송 시인은 딱지본에서 따온 제목의 시집을 낸 것이 '식민지 감정을 조금이나마 다독인 셈'이라고 시인의 말에 적었다.
"식민지 시대에 우리 민족의 감정을 딱지본을 통해 정리해봤어요. 예를 들어 '화류 비극 유곽의 루'는 원작에 없는 만주 이야기를 시에다 넣어 만주가 한민족에게 어떤 공간이었는지 재해석했죠. 지금 시기에 딱지본이 어떤 의미인지를 재해석하고, 친일 문학 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내 나름의 윤리관을 세운 것입니다."
표제작이기도 한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은 그의 식민지 감정을 다독인 대표적인 시다.
시에 나오는 '진명'이라는 조선 시대 청년 시인은 일도 되지 않고 몸도 아프다가 죽는다. 마치 그가 사는 조선의 운명과 연장 선상에 놓인듯하다.
'진명의 신명은 시드럿다 / 소셜이 자기 직업이 안이란 걸 시인 진명은 깨우치지 못한다 / 궁핍의 겁질이 시를 못 쓰게 부추긴 거슨 안이엇다라고 희미하게 알고 잇셧지만 자신의 궁핍이 또한 조션의 궁핍이라는 것도 청년은 자각하지 못햇다'('슬프다 풀 끗해 이슬' 부분)
송 시인은 문장 단위에서 이미 독자성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등 섬세하고 개성 있는 특유의 한국어로 고유한 시 세계를 이룬 시인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런 그의 감각적인 문체를 마음껏 음미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들이 독자들을 반긴다.
'별이 잠드는 곳은 별들의 숫자만큼 물웅덩이가 널렸다는 서쪽 / 밤하늘에 별보다 더 많은 손금을 남기는 / 별의 잔상은 지상에서 건너간다는데 / 그게 위독인가 싶어 별과 별 사이 / 가장 빠른 직선을 그어보았다'('별과 별의 직선' 전문)
'저녁의 뻘로 귀얄질을 하면서 바다의 얼굴은 뭉개어졌다 분명한 이목구비가 없기에 느린 파도는 머리칼을 밀고 간다 독백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집어등이 차례차례 켜진다 그때 너는 되돌아보았느냐 뻘이란 뻘 모두 사춘기인 것을, 바다가 먼바다를 끌어당기듯 어둠이 어둠을 받아적는 것도 보았다'('그때 너는 바다로 들어갔다 / 그때 너는 무엇이었느냐' 부분)
송 시인은 "일부 시인들은 한가지 사물이나 사건에 한 단어만 적용하는 데 같은 사물·사건에도 사람마다 이미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며 "이를 다양하게 표현하고자 우리말 사전을 공부하는 등 언어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러면서 내 고유의 문체가 만들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bookmani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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