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의 '살롱 외교'…"한국에 군대 보내야" 지지도 받아

입력 2019-03-14 06:05  

헤이그 특사의 '살롱 외교'…"한국에 군대 보내야" 지지도 받아
만국평화회의 주요 사절단 참여한 살롱서 상주하듯 활동
"유력인사들, 특사 연설 들으려 대기"…여성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도 지지
폴란드 기자 제안으로 대한제국 처지 동정하는 결의안 채택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헤이그 특사는 일반적인 역사 인식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다.
1907년 2차 만국평화회의에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한 데다, 특사단 중 한 명인 이준이 헤이그 현장에서 순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새로 발굴된 네덜란드와 독일 언론 보도로 그들의 활동상을 재조명할 때 실패라는 단어를 특사단의 활동 결과로 정리하기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연합뉴스가 독일 뷔르츠부르크대(University Wuerzburg) 중국학과의 고혜련 초빙교수(Prof.Heyryun KOH)를 통해 입수한 당시 네덜란드와 독일 언론 기사를 분석해보면, 특사단은 회의장 맞은편 건물에서 진행된 '살롱 외교'의 주인공 중 하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유력자가 자택에 정치인과 예술가들을 불러 토론하는 '살롱'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헤이그 특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렸고, 여성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 유명한 국제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네덜란드 월간지 프리덴스-바르테의 1907년 7월호 기사에 따르면 국제평화주의자들은 프린세스그라흐트 거리 6A번지의 집 전체를 프레스룸과 살롱을 위한 장소로 빌렸다.
이 기사에는 "이 집의 반지하 공간에는 '국제모임'이 매주 열렸다"면서 유명 인사들과 함께 대한제국 대표단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청중으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최고의 그룹이 함께 했다. 평화회의 대표단들과 네덜란드 국회의원들이 자주 참석했다"고 썼다.
사실상 공식회의는 아니었지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이 '국제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비공식 회의가 열린 셈이다.
더구나 이 기사는 "이 집 1층은 만국평화회의 소식을 전하는 언론사의 편집실과 주요 편집인들의 작업실로 사용됐다"고 전했다.





독일 신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같은 달 25일 자 기사에서 헤이그 특사의 로이터 통신 인터뷰 내용을 전했다.
"그들은 (헤이그 살롱에서) 밤마다 대한제국을 네덜란드와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고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보장하도록 해야 한다며 논의를 일으켰다"
네덜란드 신문 헤그쉐 쿠란트의 같은 달 10일 기사에서는 특사단의 '살롱 외교'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지난밤 이준, 이상설, 왕자 이위종으로 구성된 대한제국 대표사절단이 국제주의재단에서 많은 유명인과 신사 숙녀들이 참가한 가운데 연설을 했다"면서 "이들은 만국평화회의에서는 연설할 수 없었으나 지난 밤 유력한 인사들이 이들의 연설을 듣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폭력적으로 파괴했다는 주장을 듣고 있었다"
이위종이 헤이그 특사의 대변인 격으로 국제주의재단에서 연설했다는 내용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이 연설 등 헤이그 특사의 '살롱 외교'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헤그쉐 쿠란트는 이위종을 호의적으로 묘사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노란 피부색의 이위종 왕자는 네덜란드에 사는 많은 (인도네시아) 자바 사람들과 비슷한 외모를 지난 친근감을 주는 청년이며, 일본인이 문명인으로 알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일본의 야만성과 신의 없는 행동을 알리고자 했다"
이 신문은 을사늑약에 대한 이위종의 연설 내용을 반영했다.
"황제는 중요한 협약으로 궁중 대신들과 상의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했다. 대신들과 고위관료들은 분노를 표하고 거부했다고 선언했다. 제국 궁전 주변에 3배가 넘는 일본군 병력이 배치돼 많은 제국의 정치인들은 이를 승인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중략) 일본인들은 야만스럽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신들은 신체적 학대와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신문은 검열됐고, 시위대는 흩어져 처형당했다…."
당시 현장에서 이위종의 연설에 일본 측의 사실 왜곡을 반영한 반론이 제기된 사실도 이 신문에 실렸다.
"(언론인인) 스테드는 일본인을 대신해 이 자리에 있었고, 1905년 조약이 황제 앞에서 결정된 것이며 유효한 문서임을 주장했다"
이 신문은 스테드의 주장을 전한 뒤 "대한제국의 왕자는 이토 (히로부미가 특사단의 위임장을) 부정해도 (고종의) 위임장은 신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고 썼다.
특히 당시 국제주의자들은 헤이그 특사들을 지원사격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로 1905년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베르타 폰 주트너는 대한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까지 주장했다.
헤그쉐 쿠란트 기사에서는 "폰 주트너는 이위종이 언급한 한국 상황에 깊이 동감하며 그녀는 대한제국의 불만을 접수할 법원과 (일본의) 그러한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세계의 군대를 원했다"고 적었다.
이 신문은 또, "러시아 신문 로코모티브의 편집장인 안 브로스후프도 대한제국을 동정해야 하고 일본에 대항해 분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이어 이 신문은 대한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는데, 폴란드 기자가 결의안을 제안했다고 썼다.
기사 말미는 결의안이 채택된 후 이위종이 감동적인 감사의 말을 전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특사는 같은 달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임무가 대한제국을 중립국으로 만들고 주권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은 독일 신문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헤이그 특사의 기사를 실으면서 소개했다.
헤이그 특사는 직접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다.
현재도 국제적인 주권 문제와 관련해 유엔의 구속력이 크지 않은 상황인데, 제국주의 열강 간에 식민지 쟁탈 각축전이 벌어지던 당시 만국평화회의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보장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만국평화회의에서 열강들은 독가스 및 특수 탄환의 사용 금지와 국제중재재판소 설치에 합의했다.
고 교수는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갔다고 한들 대한제국이 중립국 지위를 보장받기는 회의의 실질적인 권능 등을 고려할 때 어려웠을 것"이라며 "비록 회담장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회담장 앞 국제모임에서 '살롱 외교'를 통해 일본의 주권침탈과 대한제국의 주권회복 필요성, 고종의 비장함을 회의에 참석한 국제평화주의자들에게 명확히 알리는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독립기념관은 고 교수에게 이번 연구를 진행했고, 지난해 12월 독립기념관의 '독일어 신문 한국관계기사집'을 발간했다.
lkb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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