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액티브] "남친·여친 있어요?"가 불편한 사람들

입력 2019-03-16 07:00  

[인턴액티브] "남친·여친 있어요?"가 불편한 사람들
'탈연애 선언' 행사도 열려

(서울=연합뉴스) 곽효원 이세연 황예림 인턴기자 = "친해지면 남자친구 있느냐는 질문을 꼭 받아요. 서로가 연애하는지 알아야 가까운 사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대학생 윤서영(24)씨는 한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다. 스스로 연애에 적합한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윤씨는 "저는 다정하거나 희생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로맨스'의 환상에 빠진 상대는 제게서 애정과 희생을 확인하려고 해요. 그들의 로맨스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는 연애하지 않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남자친구 있어요?"로 시작한 대화는 "왜 연애를 안해? 연애가 얼마나 좋은데"로 흘러갔다. 윤씨는 "한국 사회에서 '비(非)연애'는 무례한 질문을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정한 연애 형태만 옳다고 보는 인식을 '정상연애 이데올로기'라고 보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은 "우리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연애는 이성애 연애이고, 연애 내에서 성 역할 구분도 뚜렷하다. 이런 것이 정상연애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 "애인이 없으면 하자가 있는 건가요"
김민서(24)씨는 본인을 "정상연애에 집착하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김씨는 연애를 사람들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는 이야기 소재이자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었다. 그는 "모두가 정상연애를 하고 있으니, 애인이 없으면 하자가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어요"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현실의 연애는 행복보다는 각본에 따른 '성별 역할극'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에 대해 싫은 점이 있어도 참고 자신이 맞춰나갔고 이것이 이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고귀한 희생정신이라고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지자 '과연 내가 행복하려고 연애를 하는 것이 맞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연애할 때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도 부담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이승호씨(가명·22)씨는 "연애를 할 때 경제적인 부담은 남자의 몫인 것 같았다.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내거나 기념일 같은 때 선물을 사야 한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정우경(28)씨 또한 "연애를 할 땐 여성에게는 공감과 이해하는 역할이, 남성에게는 연애를 주도하는 역할이 부여되는 것 같아요. 나도 내 얘기가 하고 싶고, 내 말에 공감을 받고 싶은데 연애할 때는 잘 안됐어요"라고 말했다.
'정상연애'가 로맨스로 포장되는 배경에는 미디어와 가부장제가 있다. 윤김지영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무의식적인 수준으로 정상연애에 대한 강요를 받는다. 신데렐라 같은 동화만 보더라도 왕자를 만나 행복한 결말을 그리면서 정상연애를 옹호하고 있다"며 "미디어와 사회가 연애를 유일한 행복으로 묘사하며 로맨스를 만든다. 심지어 소유욕이나 종속적인 연애관계마저 '진심으로 원하는 사랑'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미디어의 정상연애 묘사는 결국 가부장제 문화를 재생산한다. 어릴 때부터 이성이 만나 성 역할을 수행하는 연애를 보편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인식이 자연스럽게 정상연애와 정상결혼, 정상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 소수자를 배제한다는 문제도 있다. 레즈비언인 김주영(가명·27)씨는 "남자친구 있어?"라는 질문이 당혹스럽다. 또다른 레즈비언인 유지희(가명·25)씨도 여자친구가 생긴 뒤부터 다른 커플과의 '다름'을 체감하고 있다. 유씨는 "정상연애, 정상결혼, 정상 가족만 수긍하는 한국 사회와 제도가 원망스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주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김지학 소장은 "모든 사람을 '정상연애' 관계에 넣으려고 하는 것은 소수자에게 폭력과 억압으로 작용한다. 정상연애의 문화와 규칙은 성 소수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들면서, 정상에 맞춰 바뀔 것을 강요한다"고 했다.


◇ '탈연애 선언' 행사의 문제의식은
지난 8일 광화문 광장에서 정상연애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탈연애 선언' 행사가 열렸다. 도우리 '탈연애 선언' 공동대표는 "다양한 인간을 남자와 여자 역할에 가두는 성별 역할극에 반대하고, 이성애 중심주의에 반대한다"며 "사회적으로 규정된 연애 각본 바깥에서 다양하고 풍부한 친밀성을 모색해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를 뒤흔들겠다"고 선언했다.
정우경씨는 긴 연애를 끝낸 뒤 오히려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정씨는 "주변에서 항상 '너는 연애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는데, 막상 연애를 안하니까 연애가 죽고 못 사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오롯이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게 좋아요. 내가 잘 지내고 나 스스로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살피는 시간이라 더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최근 정상연애로 시작해 가부장제로 이어지는 흐름에 반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등장하고 있다. 출간과 동시에 주목을 받는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비혼 여성 둘이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살림을 합쳐 서로에게 적응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결합이 가족의 기본인 시대를 넘어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김주영씨는 주변의 성 소수자 지인들과 함께 모여 사는 대안 가족을 꿈꾸고 있다. 그는 이 시도를 "자신이 선택한 가족들과 서로의 정상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표현한다. 김씨는 "성 소수자라서 정상사회로 편입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어요. 그래서 안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친구들과 '우리가 서로의 정상세계가 되자'고 다짐해요"라고 말했다.
kwakhyo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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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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