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악화 자제·'소심한' 대미 압박 가능성…당분간 현상 유지 행보 전망
(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 북한이 20일 현재 닷새째 미국에 대해 침묵하며 '포스트 하노이' 행보에 대한 장고에 들어간 모습이다.
메아리, 여명, 우리민족끼리 등 북한의 모든 대외용 선전 매체는 지난 14일까지만 해도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라며 미국과 대화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 비난을 삼간 채 미국을 향해 영변 핵시설 폐기와 부분적 제재 해제를 맞바꾸는 '단계적 비핵화'를 촉구하며 "이보다 더 좋은 방안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대외선전 매체들에 쏟아지던 이런 논조의 대미 언급은 15일부터 사라졌다.
이들은 북한의 공식 매체는 아니지만, 북한 당국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홍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들 매체는 북한의 공식 매체인 조선중앙통신과 조선중앙방송,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등이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침묵 모드를 유지할 때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북한이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낸 것은 15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브리핑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다.
최선희 부상은 이날 평양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관 관계자들을 불러 북미 협상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브리핑했다.
최 부상은 회담 결과와 관련해 "(분명한 것은) 이번에 미국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라고 미국 책임론을 강조하면서 핵과 미사일 '시험 유예'를 계속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결정에 달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케미를 특별히 강조, 대화 지속 속내를 드러냈다.
같은 날 조선신보 역시 미국이 '일괄타결·빅딜' 입장을 고수하는 한 북미 협상 재개가 어려울 것이라며 태도 변화를 촉구하면서도 대화 지속에 무게를 실었다.
이처럼 최 부상의 브리핑과 조선신보 기사를 끝으로 닷새째 공식 매체든, 선전용 매체든, 개인이든, 기관이든 어디서도 대미 관계에 대한 북한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태도로 미뤄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리뷰하고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 진지한 내부 논의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북미 협상에 관련된 주요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이 평양으로 귀국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주목된다.
소식통에 따르면 지재룡 중국 대사, 김형준 러시아 대사, 김성 유엔 대표부 대사는 지난 19일 여러 명의 외교관과 함께 평양에 귀국했다.
작년 7월 대사회의(재외공관장회의)가 있었던 만큼 이들 주요국 대사의 귀국은 현 북미 상황에 대한 분석과 평가. 향후 대응방안 논의를 위한 평양행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김정은 위원장이 대미협상 관련국 대사들을 불러들여 각국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향후 노선을 결정하겠다는 고민의 산물일 것이라는 관측을 낳는다.
북미 협상을 지속할지, 아니면 과거로 회귀할지, 아니면 신년사에서 언급했던 '새로운 길'을 모색할지 등을 결정하기 위해 다각도의 고민이 이뤄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에서는 진퇴양난에 서 있는 셈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북한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당황스럽지 않았겠냐"며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많은 기대를 하고 60시간 이상 기차를 이용해 갔다가 빈손으로 귀국한 것에 대한, 많은 국내 정치적 어려움이 있지 않겠냐고 추정해본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당분간 정세를 악화시키는 과거로 가기보다는 미국의 일괄타결 입장에 저항하면서 현상을 유지해 나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의 과거 회귀는 국제사회의 불신을 키우고 미국을 자극해 대북제재의 수위를 끌어올려 북한 경제의 숨통을 더욱 죄는 결과만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최고지도자라 해도 국가정책과 국정 목표를 손바닥 뒤집듯 하기 어렵고, 이런 사실이 공개되면 잘못된 판단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불러와 지도력을 훼손할 수 있다.
최 부상이 지난 15일 브리핑에서 북미 정상의 케미를 강조하고 "핵과 미사일 모라토리엄을 계속 유지할지에 대해 김정은 위원장이 곧 결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건대"라며 개인적 의견에 포커스를 맞춘 것도 대미 압박용으로 강행 여부가 낮다는 게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결국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면서 북미 관계를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소심한 압박과 대응 행보를 보이면서 사실상 현상 유지라는 전략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예상이 나온다.
한 전문가는 "김정은 위원장이 경제성장에 대한 의욕이 높지만, 현재 국면에서는 그것을 포기한 채 내부자원 등을 총동원하며 버티면 체제 유지에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의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굳이 미국의 현 정부와 서둘러 협상하고 합의하기보다는, 차기 정부와 담판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도 있다.
미국은 4년마다 한 번씩 대통령 선거가 있고 정권이 교체되지만, 북한은 계속 김정은 리더십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chs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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