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길을 묻다] "오바마가 벤처인들과 매달 간담회 한 이유는"

입력 2019-03-31 05:55   수정 2019-03-31 11:18

[한국경제 길을 묻다] "오바마가 벤처인들과 매달 간담회 한 이유는"
'스타트업 아메리카' 주도…에어비앤비·드롭박스 등 우량기업 배출
"혁신의 DNA, 생태계에서 나온다"…K-스타트업도 '생태계의 힘' 절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특별취재팀 옥철 특파원 = 2016년 6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 스탠퍼드대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글로벌 기업가정신 정상회의(GES).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재킷을 벗어 던지고는 머리에 무선 헤드 마이크를 착용했다.
옆에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등이 앉았고, 주변엔 잔뜩 호기심을 품은 듯한 일단의 스타트업(창업기업) 대표들이 둘러쌌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창업가들이여, 당신들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bridge)여야 한다. 파괴적 혁신은 때로는 무서울 수 있지만, 낡은 기술과 구조를 뛰어넘어야만 더 많은 기회와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5년여 전인 2011년 2월 1일 백악관.
집권 1기의 오바마 전 대통령은 '스타트업 아메리카 이니셔티브'(Startup America Initiative·이하 스타트업 아메리카)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우선 20억 달러(약 2조3천억 원)의 연방자금을 벤처캐피탈 매칭펀드에 쏟아붓겠다고 약속했다. 혁신을 통한 경기 회복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이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창업기업인들이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낼 것임을 확신한다."
오바마의 스타트업 아메리카는 한 곳에 고정된 벤처 인큐베이터가 아니라 '움직이는 벤처 생태계'(ecosystem)를 표방했다.



AoL 공동창업자 스티브 케이스, GE CEO 제프리 이멜트 등 대기업들이 참여하는 '드림팀'이 구성됐다. 정부는 물론 대기업들도 일정액을 펀딩하기로 했다.
창업기업에 대한 자금지원과 세제혜택, 인재수혈을 결합한 데 이어 스타트업 비자처럼 법적 규제까지 들어낸 '종합선물세트식 생태계'다. 스타트업 비자는 창업기업이 해외 인재를 제한 없이 영입할 수 있는 채널이 됐다.
6개월 뒤 드디어 백악관 스타트업 아메리카 블로그에 성공 스토리가 올라왔다.
오하이오주립대 분자생물학 박사 토니 지오다노가 당뇨병 환자 말초동맥질환 개선을 위한 혈류촉진제를 임상에서 테스트한 얘기다.
테라바스크(TheraVasc)란 스타트업을 창업한 지오다노의 개발팀은 실험실에서 획기적인 신약을 개발했지만, 이를 테스트하기 위해 병원에 들고갈 종잣돈이 없었다. 1~3상의 임상시험은 한 번에 수십만 달러의 비용을 요구했다.
포기할뻔한 순간 스타트업 아메리카를 등에 업은 에인절 투자자들이 나타나 단번에 200만 달러를 이 창업기업에 쏴줬다.
TV1001이란 신약을 개발한 테라바스크는 현재 당뇨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제약사 바이엘, 머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10대 플레이어로 평가받고 있다.



로스앤젤레스(LA) 소재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출신 통신학도들의 사연도 블로그에 올라왔다.
이들은 미국 내 택시 공차율(빈차로 돌아다니는 비율)이 57%에 이른다는 점에 착안해 택시-고객 연결 앱 서비스 '업스타트 모바일'을 개발해 창업했다. 우버·리프트와는 다르고 카카오택시와 유사한 서비스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의기양양하게 시작한 사업을 샌디에이고로 확장하려는 순간 좌초 위기를 맞았다. '실탄'이 떨어지면서 기사와 고객이 마구 이탈했다.
그 순간 스타트업 아메리카를 통한 샌드힐 에인절스의 지원금 50만 달러가 이들에겐 '생명수'가 됐다. 업스타트 모바일은 현재 미국 내 10개 도시에 월 4만회 서비스를 운영하며 탄탄한 공유경제 기업으로 성장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스타트업 아메리카를 시작하던 2011년 미국의 벤처캐피털 투자는 250건, 50억 달러였으나 2015년에는 550건, 110억 달러로 배 이상 불어났다.
똑똑한 창업기업 30개만 키워보자던 스타트업 아메리카는 1만3천개 스타트업 네트워크의 '산파역'을 해냈다. 기업 배양의 전문가인 카우프만 파운데이션이 백악관과 의기투합한 결과다.
실리콘밸리를 빛나게 한 무수한 스타트업의 뒤에는 '연방정부 + 민간 매칭펀드'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숨어있었던 셈이다.
실리콘밸리 마운틴뷰에 있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Y콤비네이터.
지난 10년간 500여 개 스타트업에 무려 1천800회 투자한 액셀러레이터(창업지원기관)의 대명사다.
Y콤비네이터의 지원을 받은 창업기업으로는 세계 최대 숙박공유업체 에어비앤비(Airbnb)를 비롯해 클라우드 서비스업체 드롭박스(Dropbox), 온라인 페이먼트 기업 스트라이프(Stripe), 소셜미디어 레딧(Reddit), 스트리밍업체 트위치(Twitch) 등이 꼽힌다.
기업공개(IPO)를 할 경우 시장가치가 10억 달러(약 1조1천300억 원)를 넘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은 기업도 꽤 있다. Y콤비네이터가 창출한 기업가치 총합은 1천억 달러에 육박한다.
Y콤비네이터의 이런 저력도 집단 지성의 힘, 즉 생태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리콘밸리 벤처 생태계에서는 기업가치 수십억 달러(수조 원)의 유니콘 기업을 넘어 수백억 달러(수십조 원) 가치의 데카콘 기업이 등장하고 있다.
올 상반기 IPO를 앞둔 우버의 시장가치는 최대 1천200억 달러(136조 원)로 평가됐다.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2015년 이미 8천억 달러(900조 원)를 넘어섰다. 세계 18위에 해당하는 경제권을 형성한 셈이다.
혁신은 이제 개별 기업의 수준을 넘어섰다. 혁신 DNA는 철저하게 생태계에서 나온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단순한 조력자 이상이다.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오바마 대통령 퇴임 특집으로 '그의 10대 액션' 중 '79개 테크 기업에 에인절 투자 약속을 이행한 것'을 상위권으로 꼽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 기반인 러스트 벨트(전통적 중공업 지대)를 되살리기 위해 위스콘신주 폭스콘 공장 착공식에 직접 참석하는 등 제조업 유턴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타트업의 기를 살리는 데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
취임 전 당선인 신분으로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 회장에게서 IT 벤처 분야에 '500억 달러 투자 + 일자리 5만 개' 약속을 받아낸 일화는 유명하다. 마윈(馬雲) 알리바바 회장과도 비슷한 담판을 벌였다.
미국 정부는 상무부, 특허청, 과학기술정책청 등 주무 부처는 물론 중앙정보국(CIA)까지 스타트업 육성에 뛰어들었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기업으로 불리는 빅데이터 분석업체 팰런티어는 9·11 이후 대테러전, 빈 라덴 제거 작전 등에 자료를 제공하면서 유명해졌다. 이 기업의 시드머니 중 200만 달러가 CIA에서 나왔다. 팰런티어는 현재 기업가치가 수백억 달러로 평가받는다.
뉴욕증시를 떠받들어온 기존 빅5 'FAANG'(페이스북·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을 대체할 새로운 빅5 'PULPS'(핀터레스트·우버·리프트·팰런티어·슬렉)에 포함된다.



올해 1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중기·벤처인들의 대화에서는 "오바마 행정부 백악관이 그랬던 것처럼 매달 정례적으로 벤처기업인과 만나달라"는 요구도 쏟아졌다.
정부는 2022년까지 12조 원 규모의 스케일업(Scale Up) 펀드를 조성해 스타트업 육성에 나서기로 했다. 1조 원 규모의 M&A(인수합병) 전용펀드와 에인절투자 세컨더리 펀드, 크라우드 펀딩 한도 확대, 스톡옵션 비과세 확대 등 인센티브 정책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한국에서도 '퓨처 유니콘 50' ICT 기업을 발굴하는 청사진을 성공 스토리로 바꾸려면 스타트업 아메리카 이니셔티브와 실리콘밸리 Y콤비네이터가 증명한 '생태계의 힘'이 절실한 상황이다.
oakchu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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