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체제 인사 출신 동독의 마지막 외무장관 멕켈 인터뷰
"바르샤바서 무릎꿇은 브란트, 폴란드 국민에 넘칠정도의 화해 메시지"
"서독, 2차세계대전 참화 동구권과 과거사 푼 뒤 동독 관계정상화 추진"
"적대적이라도 상대에 대한 존중 있어야 대화 가능…폭력은 안돼"
"서독 기자 동독에 상주하며 보도한 것 동서독인 모두에 큰 변화"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첫 시리즈인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에 이어 '동서독 정상회담과 서서갈등'을 주제로 한 두번째 시리즈입니다. 3개의 기사를 3일간 연재 중입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⑦ 정상회담장앞 좌우충돌로 아수라장…"극단주의 저급성"
⑧ '성과없어도 정상회담 좋다' 분단 벽앞 총리도 시민도 냉철
⑨ 동독 마지막 외무 "남북정상, 한국전쟁 전몰자 함께 추모해야" ←←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남북한 정상은 한국전쟁 때 전몰자 묘지에 공동으로 방문해야 합니다. 남측, 북측 전사자가 묻힌 곳에서 함께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남긴 상처를 넘어 화해하면서 미래 관계를 맺어가는 상징적 의미가 될 것입니다."
독일 통일 직전 동독의 마지막 외무장관을 지낸 마르쿠스 멕켈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
동독 사회주의 정권에서 반체제 인사로 활동해온 멕켈 전 장관은 1990년 3월 동독에서 민주적 선거로 들어선 로타르 드 메지에르 총리 체제에서 입각했다. 통일 이후에는 연방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멕켈은 현재 북미관계가 냉각기여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가능성이 상당히 낮지만, 관계 호전 이후를 가정해 답변했다.
그는 한반도와 달리 동서독 간에 전쟁은 없었지만, 서독과 동구권 국가 간에 2차 세계대전의 과거사를 풀어가는 게 동서독 관계 정상화의 출발점이었다고 설명했다.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되려면 소련, 폴란드와의 전쟁 참화가 남긴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했어요. 전쟁 책임은 명백히 독일에 있었죠. 이것을 독일이 인정한 뒤에야 배상이 이뤄지면서 화해가 시작된 것이죠"
특히 그는 당국 간의 관계 정상화가 먼저지만, 시민들 간의 실질적인 화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전쟁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역사적인 사진은 정말 중요했습니다. 아직 서독과 폴란드 정부 간에 배상 문제 등에 갈등을 겪고 있지만, 당시 브란트 총리의 행동 하나로 폴란드 국민에게 화해의 메시지가 넘칠 정도로 전달됐죠. 정부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민 간 단절된 유대감을 복원하고 솔직한 사과를 통해 관계를 진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멕켈 전 장관은 49년 전인 1970년 5월 서독 카셀에서의 2차 동서독 정상회담에서 서독의 일부 좌우 극단세력 간 물리적 충돌을 일으킨 것 이상으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시 갈등 상황이 첨예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 문제를 넘어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이뤄져야 대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답방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다만, 김 위원장과의 대화가 독재체제를 승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화 상대로의 존중과 상대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 및 정당화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또, 정상회담에 대한 정치적 의사에 따라 시위 자체는 당연히 할 수 있고, 민주주의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시민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하더라도 최소한 대화 상대방으로서 존중해줘야 해요. 아무리 적대적인 대상이라도 대화를 하는 국가 수반이라면 존중해줘야 합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대화가 막히지 않습니다"
이어 멕켈 전 장관은 민간 분야의 교류·협력이 동서독 관계 정상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특히 동독에서 서독 매체를 접할 수 있었던 환경이 가져다준 효과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동서독 1970년 3월 19일 1차 정상회담이 열린 에어푸르트에서 동독 시민이 브란트 총리가 묶는 호텔로 몰려와 '빌리'라고 환호한 점을 대표적으로 들었다.
멕켈 전 장관은 "서독의 정치인 중 누가 더 좋다고 비교할 정도로 동독인들이 서독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동독인들은 브란트 총리를 많이 좋아했다"면서 "이에 반해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에 대해서는 브란트 총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좋지 못했는데, 이런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이었다"고 설명했다.
브란트 총리에 대한 동독인들의 환호는 이후 정상회담 개최에 영향을 미쳤단다.
"동독 정권 측은 이런 상황을 정확히 예상하지 못해 충격을 받았어요. 슈토프 측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됐죠. 앞으로 정상회담 대신 실무회담 중심으로 가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거죠. 실무회담은 동서독 어느 곳에서 열리든 다 공개되는 건 아니니까요"
멕켈 전 장관에게 당시 동독 내 반체제 인사들이 정상회담을 바라봤던 시선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동독의 체제 비판적인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시민들 모두 정상회담을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대체로 희망을 갖고 지켜봤습니다"
당시 서독 내부에서는 정상회담이 동독 정권을 정당화해준다는 여론도 일부 있었다.
"브란트 총리는 정상회담 반대파에 대해 우려를 이해하지만 그런 상대방일수록 더 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체제가 우월하고 당신 체제가 잘못됐다고 말하려면 대화의 의미가, 대화할 이유가 없죠. 상대방을 인정해야 대화가 가능한 것이죠"
멕켈은 정상회담의 성과와 관련, 정상회담 이전의 베를린 통행협정과 정상회담 이후 2년여 뒤 체결된 기본조약, 1975년 헬싱키 협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동독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정보유입이 질적, 양적으로 확대됐죠. 서로 언론인을 교환한 게 컸죠. 서독 기자가 동독에 상주하면서 동독에 대해 보도한 것은 동서독인 모두에게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특히 그는 민간교류의 질적 양적 확대를 강조했다.
"민간교류 확대 이전에는 해외 휴가지에서 상대방 시민을 만나면 '스파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흔히 가졌죠. 그러나 점점 교류 규모가 커지면서 서로에게 불신감이 사라지고 친밀감이 늘어났습니다. 한국이 대북정책에서 귀 기울여 참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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