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60)여전히 문턱 높은 독립유공자 인정

입력 2019-04-03 06:00   수정 2019-04-08 07:04

[3ㆍ1운동.임정 百주년](60)여전히 문턱 높은 독립유공자 인정
행적 자료 찾는데 어려움…후손들이 발품 팔고 서명 운동도
"독립운동가 발굴은 정부의 사명…문헌·영상 아우르는 아카이브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1. 권혁우(75) 광복회 부산지부 남부연합지회장은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 안성녀(1881∼1954) 여사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권씨의 친할머니인 안성녀 여사는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다.
권씨에 따르면 안 여사는 황해도에서 남편과 함께 양복점을 운영했으며,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1909년)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등에서 지내며 독립군 군복을 만들고 식량이나 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등 묵묵히 독립군을 도왔다.
안 여사는 해방 후 귀국해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해 생활하다가 1954년 4월 8일 숨졌다.
권씨는 안 여사의 독립운동 기여에 관한 몇몇 애국지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지난 2006년 안 여사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적을 입증할 만한 행적 기록이나 공식 자료 등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권씨는 자료를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현재까지도 안 여사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권씨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100년 된 자료를 어떻게 찾겠냐"면서 "답답한 마음에 작년부터 '안성녀 여사 독립유공자 수훈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전국 각지에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2.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일본 관동군과 맞서 싸운 고(故) 양승만 씨의 다섯째 딸 양옥모(78)씨 가족은 아버지에 이어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기 위해 10여년째 노력중이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한 부친 양승만씨는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나, 조부 양건석(1893∼1938) 선생은 아직 국가로부터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양씨 가족은 양건석 선생이 경기 양평 일대에서 3·1 운동을 독려하고 항일 활동에 힘썼다며 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자료 불충분'이었다.
양평문화원이 2006년 발간한 자료에는 조부가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 '항일애국지사들의 중간 연락과 숙식 제공 및 여비를 지원했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증빙 자료로 인정되지 못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새로 찾아내고 공적을 기리는 일에 관심이 쏠리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독립운동을 하고 항일 활동에 앞장섰더라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명을 쓰거나 기록 자체를 없앴다면 관련 자료나 증언을 발굴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보훈 당국은 올해 3월 역대 최대 규모로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포상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현실의 '문턱'이 여전히 높다고 토로한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시작된 1895년 전후부터 해방 전날(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한 사실을 인정받아 건국훈장·건국포장·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대상으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나눠 독립유공자로 지정한다.
기존 서훈 사실이 없을 때는 유공자 본인이나 후손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적·행적 등을 정리한 서류를 보훈처에 제출하면 공적심사위원회 심의를 거쳐 포상 여부가 결정된다.
심사 과정에서는 특히 일제 치하의 수감 기록, 재판 기록 등 '객관적' 문헌 자료가 중요한데, 자료가 남아 있다고 확신하기 어려운 데다가 일반인이 이 같은 자료를 찾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15년, 2018년 두 차례 공적 심사에서 반려됐다는 박모(75)씨는 "지난해 독립유공자 기준이 완화됐다고 해 희망을 가졌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 개인이 수십 년 전 역사 기록을 찾는 건 한계가 있다"고 답답함을 털어놨다.



박근영 사단법인 독립유공자유족회 상임부회장은 "부산에 있는 정부기록보존소까지 찾아다니며 할아버지(박환규·애족장) 서훈을 받는데 딱 10년이 걸렸다. 독립유공자로 바로 인정된 경우를 여태껏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국내외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고령의 후손들에게는 접근성이 떨어진다. 국가기록원, 독립기념관 등을 쫓아다니며 발품을 팔다 끝내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독립유공자 기준을 둘러싼 지적도 여전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안맥결 여사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다소 까다로운 기준 탓에 독립 투쟁에 나서고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안 여사는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한 달여 만에 가석방됐다는 이유로 그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다가 지난해 정부가 기준 항목을 일부 완화한 뒤에야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앞서 정부는 올해 3·1절 기념식에서 333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하고 '마지막 한 분의 독립유공자'까지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게 후손들의 평가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독립유공자 숫자는 총 1만5천511명인데, 반세기 동안 이어진 독립 투쟁의 역사를 감안하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유공자들이 많으리라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보훈처가 자체 연구로 발굴, 포상한 독립유공자(발굴 후 포상되기 전 유족이 신청한 건수도 일부 포함)는 2016년 294명, 2017년 254명, 2018년 248명 등으로 집계되지만, 사료 발굴을 위해 더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춘재 흥사단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 상임대표는 "독립유공자를 찾고 예우하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상시 운영되는 '센터'를 만들어 필요한 자료를 함께 찾고 무명의 독립유공자와 후손을 매칭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국내외에 흩어진 자료를 찾고 잊힌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게 정부의 사명이자 책임"이라며 "문헌뿐 아니라 영상, 사진 등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아카이브(자료센터)를 건립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ye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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