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삭감·신분 불안정·실업팀 해산 우려에도 문체부 '뒷짐'
(서울=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 한국 엘리트 체육의 뿌리를 지탱하는 전국 17개 시·도 체육회는 요즘 앞날을 내다볼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자체 의원의 체육단체장 겸직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뒤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아서다.
새 개정안은 공포 1년이 지난 후인 2020년 1월 16일 시행된다.
그간 지자체장이 해당 지자체 체육회장을 겸임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법 개정안에 따라 17개 시·도, 228개 시·군·구 체육회는 내년 1월 15일까지 새로운 체육회장을 선출해야 한다.
법 개정안은 정치와 체육을 분리하고, 체육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립하며 각종 선거에 체육 단체가 동원되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충분히 예견되는 문제점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대안도 세우지 않은 채 서둘러 법 개정안을 밀어붙인 바람에 지방 체육인들과 지자체 소속 선수·지도자들이 피해를 보게 생겼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과 체육회는 지난달 전국을 돌며 지자체장 체육회장 겸직금지법과 관련한 시·도 체육회의 의견을 청취했다.
지방 체육인들은 지자체장이 체육회장을 맡지 않을 경우 시·도체육회와 지자체 실업팀에 예산 지원을 축소할 것을 가장 우려했다.
현재 지방 체육 단체는 예산과 시설 이용 등 거의 모든 부분을 지자체에 의존한다. 공공 체육시설도 지자체 소유이며, 지자체는 체육 단체 예산의 95%를 지원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자체장과 새로 선출되는 체육회장이 갈등을 빚는다면 체육 단체 예산이 줄어들거나 지자체 산하 실업팀이 사라질 수 있다고 지방 체육인들은 걱정한다.
소속팀을 잃은 엘리트 선수들이 속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2017년 현재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전체 977개 실업팀의 50%인 489개 팀이 지자체 팀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훈련하던 선수들이 졸지에 실업자로 내몰리면 당연히 경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선수 개개인의 실력 저하는 국제대회에서 한국 스포츠의 경쟁력 저하로 직결된다.
예산 삭감은 시·도 체육회 근무자들의 신분 불안으로도 이어진다.
익명의 한 시·도체육회 관계자는 2일 "지자체의 예산 축소는 시·도 체육회 조직 축소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기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공'이 많아지면 또 중앙정부가 일관된 체육 정책을 펴기도 어려워진다. 지자체장이 체육회장을 겸직했을 때보다 이해관계에 따라 충돌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은 정치와 체육의 분리라는 애초 목표와 달리 체육의 또 다른 정치 종속화 문제도 내포한다고 체육인들은 지적한다.
지자체가 산하 체육회와 실업팀 예산 편성권을 쥔 이상 지자체장과 성향이 다른 새 체육회장에게 독립성을 보장하기보다 의견 추종을 강요할 공산이 짙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4년마다 치르는 지방 체육회장 선거가 정치적·행정적 부담을 야기하고, 현직 체육회장이 재선에 나서면 체육회 정관에 따라 3개월간 체육단체장 공백이 불가피해 여러모로 업무 추진이 쉽지 않다고 체육인들은 입을 모은다.
상황이 녹록지 않게 전개되는데도 체육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사실상 뒷짐만 진 채 체육회에만 모든 것을 맡겼다.
체육회도 예산을 문체부에서 받아서 쓰는 터라 지방 체육인들의 우려를 씻을 재원을 편성하거나 배정할 여력이 안 된다.
체육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방 체육회장 선거 방법과 시기 등을 정해주거나 지자체가 일정액 이상을 반드시 산하 체육회나 실업팀에 지원하도록 지자체 조례를 제정토록 제안하는 일 정도다.
폭력과 성폭력 등 엘리트 체육의 폐해가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긴 했어도 그간 국민의 자긍심을 높인 엘리트 체육의 사기를 꺾어선 안 된다는 여론도 분명히 존재한다.
남북이 2032년 하계올림픽 공동 유치에 도전한 이상 엘리트 체육의 근간을 이루는 지방 체육회와 지자체 실업팀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정부가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cany99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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