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정립모델 제시했지만 갈 길 먼 제주4·3

입력 2019-04-02 15:03  

과거사 정립모델 제시했지만 갈 길 먼 제주4·3
국가폭력 양민학살 공식화 및 대통령 사과, 희생자 1만4천명 인정
피해자 배.보상 특별법개정안 통과, 美책임 규명 등 추가 진상조사 필요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한국 정부 수립 전후 발생한 제주4·3은 희생자들의 피해 정도만 보더라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참극이다.
정부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은 1947년 3·1절 기념식 발포사건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의 진압 등 소요사태 와중에 양민들이 희생된 것을 말한다.
적게는 1만4천,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잠정 보고됐다.
좁은 섬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했고 그 후유증을 극복하고 진상규명을 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고 있다.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와 그 유족 등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물론 이념 논란을 극복한 철저한 진상규명 등 과제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다.
생존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4·3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 과거사 정립 모델 제시
제주4·3특별법이 20년 전인 1999년 제정되면서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국가폭력에 의한 양민학살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도 구성돼 희생자와 유족 심사, 위령 및 유해 발굴, 기념사업 등의 활동을 했다.
2003년 제주4·3에 대한 진상을 밝힌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가 2003년 발간 및 정부 채택으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폭력에 의한 학살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공식으로 사과했다.
과거 정부에서 한국 정부 수립 전후의 문제에 대해 언급 자체를 금기시했으나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면서 4·3에 대한 기록과 증언 등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또 위원회의 활동으로 1만4천363명을 제주4·3희생자로 인정했고 총 6만4천378명을 유족으로 인정했다. 정부는 생존 희생자와 유족에게 생활지원금과 의료비 혜택을 주고 있다.
제주공항 활주로 등에서 제주4·3 당시 숨진 희생자의 유해 발굴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밖에 4·3 평화공원의 단계별 조성 사업과 제주4·3평화재단의 출범, 제주4·3희생자 지도와 백서 제작, 국가적 추모기념일 지정 등을 이뤄냈다.
사법부에서도 진상규명의 물꼬가 트였다.
지난 2월 1일 제주4·3 생존 수형인 18명이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타지로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4·3 당시 범죄기록이 모두 삭제됐다.
이들 18명은 4·3 수형 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청구 소송 선고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공소기각이란 형사소송에서 법원이 소송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경우, 실체적 심리를 하지 않고 소송을 종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4·3 당시 이뤄진 군사재판이 별다른 근거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져 재판 자체가 '무효'임을 뜻해 이들 수형 희생자 18명이 사실상 무죄라는 의미다.


◇ 강요된 금기를 깬 역사
4·3은 흔히 두 가지의 역사가 있다고 한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4·3 당시 그 자체의 역사 하나와 4·3 이후 반세기 침묵이 강요된 세월 속에서 펼쳐진 진상규명 운동의 역사다.
4·3진상규명 운동이 없었으면 특별법 제정과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의 성과도 볼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1960년 4·19 혁명으로 끝나자 그해 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조사단이 꾸려지고 학살 피해 접수가 잠시나마 이뤄졌다. 그러나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강요된 침묵 속에 다시 빠지게 된다.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되면서부터 금기는 깨지기 시작한다. 1949년 1월 조천읍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 집단학살을 다룬 순이삼촌은 제주4·3의 참혹한 진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드러냈다.
이후 1980년대 현길언·오성찬·고시홍 등 제주 출신 문인들이 4·3 이야기를 작품 속에 담아냈다.
대학가의 4·3 진상규명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1986년 4월 3일 제주대 총학생회는 학내에 4·3 분향소를 설치했고, 1년 뒤에는 진상규명을 하자는 주장을 담은 대자보들이 내걸렸다.
1988년에는 제주 출신 지식인들도 서울 등지에서 공개적으로 4·3 학술행사를 열었다. '제주도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의 '제주도 현대사 재조명-4·3 배경과 경과' 학술행사와 일본에서 열린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의 4·3강연회가 대표적이다.

1989년 기점으로는 민주화운동단체들이 연합, 4·3 진상규명에 대한 열망을 대중적으로 끌어올렸다.
제주여민회, 제사협, 제주지역총학생협의회 등 사회·문화·학생단체들은 '제주4·3 추모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해 4월 3일을 전후해 '사월제'를 열었다.
4월 3일에는 '4·3추모 및 범도민 진상규명촉구대회'도 제주시민회관에서 개최했다. 4·3(1948년 기준) 이후 41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적인 추모행사가 마련된 것이다.
범도민 촉구대회에서는 4·3 관련 정부 보관자료 공개, 연좌제 폐지, 미군정의 4·3 학살 책임 인정, 국회의 4·3 진상조사 등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열망 속에 1989년 5월 문을 연 제주4·3연구소는 4·3피해자 및 유족 채록집 '이제사 말햄수다'(이제야 말합니다)를 출간했다.
언론계에서도 활발한 4·3진상규명 취재가 이뤄졌다.
1988년 당시 제주신문은 4·3취재반을 결성, 발굴 취재에 나섰다. 제주신문의 직장 폐쇄 이후에는 1990년 6월 창간한 제민일보가 1999년 8월 28일까지 '4·3은 말한다'를 456회에 걸쳐 장기 연재하며 4·3의 배경, 발발 후 진행 과정에 대해 주민과 정부, 미국·일본 자료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문민정부 수립 후인 1993년에는 제주도의회에서 '4·3 특별위원회'를 구성, 피해 신고를 받는 등 공공기관에서 4·3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 끝나지 않은 4·3
제주4·3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보상 안을 담은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어 유족 등 제주도민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1일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어 오영훈 의원(더불어민주당·제주시을)이 대표 발의한 전부개정안 등 관련 법률 4건을 병합 심사했으나 여야의 논란 끝에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을 심사 보류했다.
이처럼 제주4·3은 과거사 정립의 성과를 내고 있으나 여전히 남은 과제들이 많다.
4·3은 미군정 체제하에서 발생했다. 4·3이 발발하게 된 배경에 1947년 미군정의 책임이 없는지 명확히 따져야만 진상규명을 제대로 이뤄낼 수 있다.
제주4·3 제7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미국과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70주년 기념사업위, 범국민위 등은 '미국과 유엔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 운동'을 진행해 지난해 10월 31일 10만명의 서명을 받은 서명록을 미국 대사관에 전달했다.
제주4·3평화재단이 지난해 12월 개최한 평화포럼에서도 미국의 책임 문제가 주요 의제로 채택돼 4·3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대한 진실규명과 정치적, 법적, 윤리적 책임에 대해 다양하게 논의했다.
4·3의 올바른 이름을 찾는 등 완전한 해결을 위한 학술대회가 열리고 노동자, 농민의 시위도 전개됐다.
4·3은 이념과 분단의 굴레로 여전히 '항쟁', '학살', '사건', '반란'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명확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4·3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공감대를 얻는 '제주4·3 전국화 및 세계화'도 과제다.
지난해 제주4·3이 70주년을 맞으면서 본격적으로 전국에 4·3의 역사를 알리고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는 제주4·3 전국화 및 세계화 운동을 시작했다.
서울 광화문과 국내 주요 지역에서 추모 열기가 올랐으나 국민적인 인식을 위해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 등 주요 국가에서 제주4·3 양민학살 문제를 다루는 활동이 지속해서 일어나도록 아낌없는 지원도 중요하다.
박찬식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은 제주4·3의 남은 과제로 "역사적 평가 보완과 행방불명 희생 실태, 진압작전의 지휘체계 규명 등을 위한 추가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kos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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