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북미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이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근년에 일(日)·청(淸)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1904년 12월 17일부터 이듬해 1월 13일까지 황성신문에 7차례 실린 멕시코 한인 노동자 모집 광고 문구다. 대한매일신보에도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이라거나 "부녀자에게는 닭을 치게 하고 하루 노동 시간은 9시간이며 계약 기간이 끝나면 보너스로 은화 100원을 지급한다"는 등의 광고가 게재됐다.
당시 멕시코에는 선박용 밧줄의 원료를 채취하는 에네켄(애니깽·용설란의 일종) 재배가 성행했는데,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전근대적 고용 관계가 남아 있는 데다 노동 강도가 매우 높아 농장주들은 인력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광고 문구대로 1897년 일본에 이어 1899년부터 중국 인력이 들어왔으나 이내 중단됐다. 그러자 영국계 멕시코인인 국제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은 한국인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1905년 4월 4일 영국 선박 일포드 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난 한국인은 1천33명. 성인 남녀가 각각 702명과 135명이었고 어린이가 196명이었다.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닻을 내린 것은 5월 8일이었으나 4일 뒤에야 하선을 허락받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어린이 2명과 남자 어른 1명이 숨지고 아기 1명이 태어나 1천31명이 멕시코 땅을 밟았다. 이들은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5월 15일 멕시코 남동부 유카탄반도의 메리다시(市)에 도착했다.
신문에 실린 광고 문구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뜨거운 사막에서 가시투성이인 에네켄 잎을 잘라내야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질이 가해졌고,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가 붙잡히면 감옥에 갇혔다. 집세도 따로 내야 하는 데다 임금은 멕시코까지 오는 비용을 갚기도 빠듯했다.
황성신문은 멕시코 이주노동자들의 참상을 전해 듣고 1905년 7월 29일 사설을 실었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이를 본 고종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동포들을 구하라"고 했지만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이를 해결할 외교권도 없었다. 1909년 5월,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났지만 조국은 사실상 국권을 빼앗겼고 돌아갈 여비도 없어 새로운 조건으로 재계약하고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274명은 1921년 쿠바로 건너갔다. 에네켄 농장은 1920년대 인조섬유가 등장하면서 문을 닫았지만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온 이민 1세대는 한 명도 없었다.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결성해 독립운동 후원과 민족의식 고취에 나섰다. 어렵게 번 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가 하면 한글학교를 세우고 3·1운동 기념행사를 열었다. 쿠바의 임천택과 멕시코의 김익주가 그 중심인물로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과 애족장을 받았다.
마이어스의 사기극이 한 차례로 끝나 추가 피해가 없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멕시코 이주자들에게는 불행이었다. 뒤따라 오는 한국인이 없어 모국과 단절되고 고립되는 바람에 정체성을 빨리 잃어버린 것이다. 남녀 성비도 맞지 않아 현지인과 결혼을 많이 하다 보니 2세와 3세로 내려가며 대부분 현지화됐다.
멕시코에는 3만여 명, 쿠바에는 1천여 명의 초기 이민자 후손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인후손회가 결성돼 있으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일부 가정에서 양배추 김치와 된장·고추장을 담가 먹으며 희미하게나마 한민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과의 경제 교류가 늘어나고 한류가 인기를 끌면서 조상의 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이민자로 구성된 멕시코한인회와 주멕시코 한국대사관도 설이나 추석 때 초기 이민자 후손을 초청해 전통 차례를 재현하고 민속놀이를 가르쳐준다. 한국과 국교가 없는 쿠바에서도 2014년 호세마르티 문화원(한인후손문화원)이 문을 연 뒤 후손들의 모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멕시코 한인들은 최근 뜻깊은 경사를 맞았다.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의회가 지난달 30일 한인 이민자가 멕시코 영해에 처음 들어온 날인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제정하는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것이다. 멕시코 남동부 최대 도시인 메리다는 114년 전 일포드 호 탑승자들이 도착해 인근 농장에서 일을 시작한 곳이다.
아루투로 레온 시의원은 "현재 메리다 시민의 DNA를 검사하면 한국인의 DNA가 검출될 정도로 메리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서 "양국 관계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김상일 주멕시코 한국대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던 선조들의 한을 달래고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의 날' 제정을 추진했다"면서 "한인 후손들이 멕시코에서 한민족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일포드 호가 출항한 인천시는 2007년 메리다시와 자매결연해 친교를 다지고 있다. 메리다시는 2017년 12월 중심지의 한 도로를 '대한민국로'로 명명했으며, 유영호 작가의 대형 조각상 '그리팅맨'(인사하는 사람)을 설치하기로 했다. 비록 가슴 아픈 일로 한국과 멕시코의 교류사가 시작됐지만 '한국의 날' 제정을 계기로 멕시코 한인 후손들이 자긍심을 되찾고 이들이 가교 구실에 나섬으로써 두 나라의 우호 협력이 더욱 튼튼해지기를 기대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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