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 실존 인물,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이사장
일본이 위안부 인정한 관부재판 이끌어…여전한 열정에 역사관 관장 활동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거기가 신고받는데 맞습니까."
1992년 어느 날 부산 정신대 신고 전화에 떨리는 목소리로 한 여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위안부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린 뒤 평생을 인권운동가로 살다 지난 1월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였다.
조심스럽게 위안부피해 사실을 알린 김복동 할머니 전화를 받은 사람은 김문숙(92)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이사장이다.
김복동 할머니를 세상 밖으로 이끈 사람이 김 이사장인 셈이다.
김 이사장은 전화를 받고 한걸음에 김복동 할머니가 있는 부산 다대포로 달려갔다. 김복동 할머니는 다대포 해변에서 작은 구멍가게에서 껌과 과자 등을 팔며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김 이사장은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평화의 집으로 가기 전까지 사비를 털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 이사장은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해 수많은 위안부피해 할머니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대부분 아픈 과거를 숨긴 홀로 살아가던 할머니들이었다.
그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헌신하고 세상에 이 문제를 계속 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작은 일본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여행사를 운영하며 여성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김 이사장은 부산으로 기생관광을 오던 일본인들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기생관광 반대 운동을 했던 김 이사장에게 한 일본인이 "전쟁 때는 돈이 없어서 몇푼 못 줬는데 지금은 일본이 돈도 많은데 왜 (기생관광)을 못하게 막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김 이사장은 본격적으로 위안부 실상을 알리는데 뛰어들었다.
1991년 10월 19일 부산에 정신대 신고 전화를 설치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 정신대 신고 전화가 설치됐고 250여명이 숨겨왔던 피해 사실을 알렸다.
전화 개통 후 한 달이 지나서 이귀분 할머니가 처음으로 김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위안부피해 사실을 알렸다.
김 이사장은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당시 여성운동을 하는 나 자신도 일본군 위안부 사실을 몰랐던 것이 부끄럽고 참담했었다"며 "과거를 숨긴 채 살아가던 할머니들이 하나둘씩 전화를 걸어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부산으로 신고를 한 할머니들과 함께 '관부재판'으로 불리는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 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 소송 이끌었다.
김 이사장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을 26차례 다녀가며 관부재판을 이끌었다. 당시 일본을 상대로 재판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상 판결을 끌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김 이사장 활약상은 지난해 영화 '허스토리'로 재현됐다.
이후에도 김 이사장은 위안부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데 멈추지 않았다.
2004년 전 재산을 털어 수영구에 부산 첫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인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했다. 이곳에는 30년 넘게 직접 모은 위안부 관련 자료와 김 이사장 활동 모습, 신문 스크랩, 재판기록 등 1천점이 넘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교사로 재직하던 경험을 살려 역사관을 찾는 수많은 학생에게 위안부 실상을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할머니들이 일본 사과를 받지 못한 채 돌아가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랑과 이해 그리고 우리 역사에 자부심으로 역사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본이 사죄할 때까지는 절대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handbrother@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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