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학살 피해자 103명, 청원서 최초 제출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학살 피해를 본 베트남인들이 관련 진상조사 등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4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 퐁니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59) 씨, 동명의 하미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62) 씨와 함께 이날 오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을 열었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와 그 유족이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진상조사 등을 요구하는 서면을 제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베평화재단과 민변 TF는 지난달 1∼15일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주둔한 중부 지방의 꽝남성과 꽝응아이성을 돌며 청원 서명을 받았다. 그 결과 16개 마을에서 103명의 베트남인이 이번 청원에 참여했다.
베트남인들은 청원서를 통해 민간인학살 진상조사와 공식 사과, 피해복구 조치 등을 할 것을 요구했다.
청원서에서 응우옌티탄 씨 등 베트남인들은 "한국군은 베트남전 파병 기간(1964∼1973년) 전쟁 중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국제인도법상 '민간인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며 "우리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던 우리 가족이 한국군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고, 한국군의 총과 수류탄을 피해 겨우 살아남았다"고 밝혔다.
아울러 "베트남 전쟁은 1975년에 끝났지만, 우리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며 "그러나 우리는 우리 고통에 마땅히 책임이 있는 한국 정부로부터 그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다"고 청원 배경을 설명했다.
올해 제주 4·3 평화상 특별상을 나란히 받은 두 명의 응우옌티탄 씨는 작년 4월 서울에서 열린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시민평화법정에 원고로 참여해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을 물었다. 시민법정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한국군으로부터 상해를 입은 베트남인 2명이 원고가 돼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종의 모의 법정이었다.
퐁니마을 출신의 응우옌티탄 씨는 "한국군의 학살이 있었을 때 나는 8살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너무나 선명해서 잊지 못한다"며 "나는 한국군으로부터 가족을 빼앗겨 전쟁고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시민평화법정은 우리의 진실을 인정했지만, 이후 1년 동안 한국 정부로부터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며 "이번에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 청원인들의 절박한 요구에 꼭 응답하고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고 힘줘 말했다.
하미마을의 응우옌티탄 씨는 "우리 마을에는 전쟁 당시 희생된 135명의 영령을 모신 위령비가 있는데, 2000년 무렵 한국대사관의 압력으로 비석에 새겨진 한국군의 전쟁범죄에 관한 기록이 가려졌다"며 "우리는 한국군의 전쟁범죄가 드러난다고 해서 현재든 미래든 양국 간의 관계가 악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는 하루빨리 우리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퐁니마을의 응우옌티탄 씨는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안다"며 "한국과 우리가 겪은 아픔은 똑같다.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려면 우리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임재성 변호사는 "그동안 한국군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피해 복구 등 어떤 절차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국정원에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학살에 가담한 군인들을 조사한 문서를 공개할 것을 수차례 요구하고 승소까지 했지만, 여전히 숨기고 있다. 국정원은 반드시 이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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