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고성=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무슨 할 일이 따로 있겠어요. 다 타 버렸으니 백지에서 다시 시작해야죠."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에 있는 함경북도 학성군 학남면 출신 실향민들의 무덤을 수십 년간 관리해온 최영걸(68) 학남면민회 회장은 새까맣게 그을린 50여 개의 산소와 망향비(望鄕碑)를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1년에도 여러 번 선친을 비롯한 실향민들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왔다는 최 회장은 "오랫동안 후손들이 함께 가꾼 나무와 잔디가 전부 잿더미로 변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날 한식(寒食)을 맞아 망향비 앞 상에 과일과 술 등을 올리며 "안타깝고 황당하지만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장사동에서 유리 가공업체를 운영하던 황남길(57) 씨도 사정은 비슷했다.
2층짜리 주택을 통째로 빌려 1층은 작업 공간, 2층은 집으로 쓰던 황씨는 4일 저녁까지만 해도 "멀리 있는 산불이 가게까지 덮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강원산불 최초 발화 추정 영상 보니... / 연합뉴스 (Yonhapnews)
다른 지역에 사는 어머니가 걱정돼 가게 문을 일찍 닫고 대피한 황씨는 자정께 돌아왔다가 폐허로 변한 일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멀쩡히 남은 게 하나도 없다"며 "기계와 공구 수천만 원어치가 전부 못쓰게 됐다"고 한숨 지으며 허탈해했다.
23년간 남편과 함께 살아온 보금자리를 잃은 김연숙(44) 씨는 화재로 무너진 집 앞을 오후 늦은 시간까지도 쉽게 떠나지 못했다.
김씨와 남편 정모(48)씨 가족이 살던 집은 어디가 벽이었고 어디가 방이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저앉은 채 잔해에 뒤덮혀 있었다..
전날 오후 8시30분께 인근 산으로 불길이 넘어오는 것을 보고 대피했다는 김씨는 "남편, 아들과 조금만 더 지켜봤더라면 집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자책했다.
그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 남편과 이 집에 처음 들어오던 때가 엊그제처럼 느껴진다"면서 "온전히 건져낼 수 있는 물건이 거의 없어 너무 슬프다"고 아들 정모(19)군의 손을 꼭 잡았다.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박영식(49) 씨도 고객들이 맡긴 자동차 5대와 함께 잿더미로 변한 가게를 둘러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박씨는 "저녁 8시께 불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들더니 컨테이너에 삽시간에 옮겨붙었다"며 "어찌할 수 없어 일단 대피했다가 돌아오고 나니 가게가 전부 타버린 뒤였다"고 화재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다행히 손님들 자동차가 전부 보험에 들어있긴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이라 막막하다"며 직원들과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앞서 전날 오후 7시 17분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한 주유소 맞은편 도로변의 전주에서 스파크가 발생해 산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이 불로 1명이 숨지고 축구장 350개 크기의 산림(250㏊)이 잿더미로 변했다. 초속 20∼30m의 강한 바람을 타고 밤사이 산불이 확산하면서 인근 주민 3천620명이 대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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