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프로야구 데뷔 60년 맞은 장훈의 마지막 소원

입력 2019-04-09 08:15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프로야구 데뷔 60년 맞은 장훈의 마지막 소원


(서울=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9년 4월 10일 일본 도쿄의 고마자와구장.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 개막전에서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스(현 니혼햄 파이터스)의 6번타자가 첫 타석에 들어섰다. 고교 시절 초고교급 타자로 알려졌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한큐(阪急)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펄로스)의 투수 요네다 데쓰야에게 공 3개로 삼진을 당한 것이다. 좌익수로 출전한 수비에서도 2회 초 평범한 플라이볼을 '만세' 부르는 자세로 놓치는 바람에 곧바로 교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의 이름은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이었다. 데뷔 무대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으나 이튿날은 달랐다. 바로 전 해 14승 4패라는 발군의 성적을 거둔 한큐의 투수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두 번째 타석에서 좌중간 2루타를 때리고, 다음 타석에서는 이시이 시게오 투수에게 홈런을 빼앗았다. 통산 3천85개 안타와 504개 홈런의 출발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3천안타-500홈런-300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세계적으로 장훈과 미국 메이저리그의 윌리 메이스 두 명뿐이다.


장훈은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고향이 경남 창녕인 부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4년 트럭을 피하다가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엄지는 밖으로 휘어지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붙어버렸다. 이듬해 8월 원자폭탄 투하로 큰누나를 잃었고, 아버지도 1946년 세상을 떠났다. 지독한 가난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오른손 장애에 시달리던 그를 구원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접한 야구였다. 프로야구 선수로 성공하면 돈도 벌고 무시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원래 오른손잡이였으나 왼손잡이로 바꾸고 날마다 손에 피가 나도록 배트로 타이어를 두들겼다.

그는 히로시마 마쓰모토상고로 진학했다가 고시엔(甲子園)대회에 출전하려고 오사카의 나니와상고로 옮겼다. 그러나 그와는 무관하게 야구부가 학내 폭력 사태에 연루돼 출전이 금지되고 말았다. 대신 재일동포 선발팀에 뽑혀 한국 고교팀과의 원정 순회경기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대회 도중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성묘하고 조부모도 만났다. 선수단 환영식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프로 무대에서도 연일 맹타를 휘두른 장훈은 두 달 만인 6월 13일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4번타자로 나섰다. 데뷔 첫해 13홈런, 57타점, 타율 0.275로 신인상을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 올스타에 뽑혔고 1961년 타격왕, 1962년 시즌 MVP에 각각 등극했다. 1970년에는 0.3834로 최고 타율 기록을 세웠는데 퍼시픽리그에서는 24년간, 센트럴리그를 포함해서는 15년간 깨지지 않았다.

1981년 은퇴할 때까지 23년간 2천752경기에 출전하며 통산 타율 0.319, 수위타자 7차례, 1천676타점, 319도루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의 별명은 '안타제조기'였다. 그라운드의 모든 방향으로 공을 쳐 내는 그의 타격 기술을 언론은 '부챗살타법', 혹은 '광각타법'이라고 명명했다.

장훈은 대만 출신의 동갑내기 왕정치(王貞治·일본명 오 사다하루)와 고교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각각 오사카와 도쿄에 있는 학교 소속이어서 '동쪽의 왕(王), 서쪽의 장(張)'이라고 불렸다. 프로에 와서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왕정치는 이른바 '외다리타법'으로 1980년 통산 868개의 홈런을 날려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다. 장훈과 왕정치는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OH포'를 이뤄 1976년 우승컵을 안았다.


장훈의 3천85안타, 왕정치의 868홈런과 함께 일본 프로야구에서 철옹성으로 꼽히는 기록이 가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의 400승이다. 최다안타와 홈런 기록은 언젠가 깨질 수도 있지만 투수가 선발·중간계투·마무리로 분업화된 요즘 400승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다. 1933년생인 가네다도 부모의 고향이 각각 경북 상주와 대구인 재일동포 2세로 한국 이름은 김경홍이다. 그는 한국 국적을 고집한 장훈과 달리 프로에 들어와 일본으로 귀화했다.

당시 일본 체육계에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 혈통을 감추고 활동하는 동포 선수가 적지 않았다. 장훈이 경기장에 들어설 때마다 벽에 "장훈을 죽여라"라는 낙서가 쓰여 있었고, 관중석에서는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야유가 빗발쳤다. 그는 자서전 '일본을 이긴 한국인'에서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는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 동포를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시원한 복수였다"고 널어놓았다. 장훈 선수 이후 한국계임을 스스로 밝힌 재일동포 선수가 늘어났다고 한다.

장훈은 1982년 한국 프로야구의 산파역이나 다름없다. 1981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별보좌역을 맡아 출범 준비를 돕는가 하면 6개 구단 감독과 코치들을 상대로 프로야구 정신을 강연하는 등 선진 야구 전수에 힘썼다. 이듬해부터 경기력 향상과 팀 간 격차 해소를 위해 KBO가 재일동포 선수들을 영입하도록 건의했고 우수 선수들을 추천했다. 2005년까지 KBO 총재 특보로 활약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80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은 데 이어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팔순의 나이에도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타격 솜씨만큼이나 날카롭기로 소문난 특유의 독설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달 23일 개막한 '2019 KBO 리그'가 연일 최다관중 신기록을 세우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류현진과 강정호 등 KBO 리그 출신 선수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장훈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 장훈은 최근 인터뷰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한 야구 단일팀이 만들어지면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밝혔다. 그의 마지막 소원일지도 모르는 단일팀 결성과 올림픽 출전이 이뤄지기를 고대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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