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학자들이 만든 '한반도 식물지' 연내 편찬"
"北 비핵화 진전 따라 단계적으로 교류 확대해야"
(세종=연합뉴스) 전성옥 논설주간 = "과학기술 분야의 내실 있는 남북교류를 추진하려면 북한의 과학기술체제와 정책 동향 등을 지속해서 연구하는 전문가를 양성해야 합니다.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고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축적된 자료와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북한과 관련된 정부나 산하 기관의 조직과 인력이 줄어들어 연구가 단절되는 측면이 있다"면서 "북한의 과학기술 전반을 지속해서 들여다보고 분석할 기반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한 이 선임연구위원은 30년 가까이 북한의 과학기술을 연구해온 이 분야의 권위자다. 남북교류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백두산 화산활동·나노·표준·통신 등 다양한 분야의 남북협력사업을 추진하고 수십 차례에 걸친 공동세미나와 포럼을 개최하는 데 앞장섰다. 남북 양측의 과학기술교류정책을 수립하는데도 산파역을 했다.
-- 북한의 과학기술 연구 토양은.
▲ 한마디로 열악하다. 북한의 과학기술 분야를 장기간에 걸쳐 지속해서 연구하는 곳은 국책연구기관인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유일하다. 민간에서 조합을 만들어 연구하는 분들이 있으나 남북 관계의 민감성이나 재정적 후원이 많지 않은 탓에 활발한 연구 활동은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남과 북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는 동안 다양한 분야의 남북교류가 끊기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 토양 역시 더욱 척박해졌다. 북한과 관련된 정부나 산하 기관의 조직과 인력이 줄어들어 연구가 단절되는 측면도 있다.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고 내실 있는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려면 북한의 과학기술체제와 정책 동향 전반을 지속해서 들여다보고 분석할 기반연구가 필요하다. 기반연구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 자료와 경험을 축적한 전문가 양성이 필수적이다.
-- 과학기술 분야의 남북교류를 되짚어본다면.
▲ 남과 북 사이에 교류와 협력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다. 당시 남북 과학자들은 직접 만나지 못하고 해외동포의 중재를 통해서 중국이나 일본에서 공동세미나를 개최했다. 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비로소 직접 접촉이 이루어졌다. 그 결실이 2004년 평양에서 개최된 민족과학기술토론회다. 남북의 과학자들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서 대규모 토론회를 개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과 북한의 국가과학원이 그동안 공동으로 개최해온 세미나와 포럼은 20차례가 넘는다. 이밖에 남한의 생명과학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화학연구원이 북한의 식물학연구소, 전자재료연구소, 김일성종합대학 촉매연구실과 교류의 물꼬를 텄다.
남북 과학자들은 백두산 화산활동·나노·표준·통신 등 과학기술의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사업도 추진해왔으나 2000년대 후반 남북 관계가 악화하면서 대부분이 중단됐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예전에 중단된 교류·협력사업을 재개하는 중이다.
남북한 과학기술 교류·협력을 위한 법적인 근거도 마련됐다. 2001년 제정된 과학기술기본법 제7조는 '남북 간 과학기술교류협력의 촉진'이라는 항목이 추가됐다. 이 법에 따라 2003, 2009, 2015년 등 3차례에 걸쳐 당시 과학기술부는 '남북한 과학기술협력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 대표적인 협력사업은.
▲ '한반도 식물지' 편찬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남과 북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추진한 첫 사업이다. 분단 이후 남한의 식물학자들은 북쪽의 식물을 본 적이 없다. 북한 식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남북 학자들은 초기에 '양측에서 발간한 식물지와 식물표본을 교환해보자'는 식으로 낮은 단계의 교류부터 시작했다. 양측의 학자들이 만남을 거듭하면서 '가시오가피 등 약용식물 추출물 은행을 공동으로 만들자', '유전자를 분석해보자'는 식으로 제안이 오가면서 교류를 넓혀나갔다. 그러다가 '한반도 식물지'를 편찬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북한 학자들이 분담한 식물지 원고도 넘겨받았으나 남북 관계가 위축되면서 이 사업 역시 추진이 중단됐다. '한반도 식물지' 편찬 사업은 최근 재개됐으며 올해 안에 발간될 예정이다.
-- 과학기술 분야의 남북한 차이는.
▲ 일반과학기술과 특수과학기술로 나눠서 봐야 한다. 북한은 중화학, 기계, 생명공학, 정보통신기술(IT), 광물자원에 관한 과학기술을 중시한다. 또 인민 경제에 필요한 4대 선행부문이라고 해서 전력·석탄·금속·철도 분야를 중점적으로 육성한다. 이런 일반 분야는 대체로 남한보다 적게는 5년, 많게는 20년까지 뒤처져 있다. 그러나 핵무기, 우주발사체 등 특수분야의 수준은 남한보다 앞서 있다.
북한을 15차례 방문했는데, 각급 연구실을 둘러볼 때마다 두 번 놀란다. 처음에는 각종 컴퓨터와 설비, 자료 등이 낙후했다는데 놀라지만 두 번째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뭔가를 이루려는 북한 과학자들의 열정에 놀라게 된다.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차도 확연하다.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답게 실리추구와 상업화를 지향한다. 반면 북한은 소비재보다는 생산재에 중점을 둔다.
연구소도 우리는 민간 분야가 활성화한 반면 북한은 민간연구소가 없다. 국가과학원이 기초과학기술에서 응용까지 도맡아서 한다. 산하에 130여 개의 연구소가 있다. 과학기술 분야의 핵심 인재들이 다 여기에 모여 있다.
-- 북한의 과학기술 정책은.
▲ 북한의 역대 정권이 모두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펴왔다. 김일성은 '주체 과학', 김정일은 '강성대국'을 구호로 내세웠다. 특히 김정은 체제에 들어서면서부터 주력 분야가 국방과학에서 민간 수요 분야로 전환됐다.
김정은 체제하의 구호는 '지식경제'와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다. 지식경제는 경제와 과학기술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발전 5개년계획'이 '경제발전 5개년 전략'과 통합되고 연구개발체제를 개편했다. 과학기술 인재를 기르기 위한 원격화상 교육도 중점적으로 추진 중이다. 산업 분야 종사자들의 수준을 북한의 5년제 정규대학 졸업자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 과학기술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려면.
▲ 북한의 비핵화 진전에 따라 단계별로 추진해야 한다. 비핵화가 답보상태인 '현 상황 지속단계'에서는 국제 제재 때문에 남북협력을 대규모로 확대하기 어려우므로 보건·의료, 재난 예측과 방지 등 제한된 범위에서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
비핵화가 진전을 이뤄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는 '협력 활성화 단계'에서는 IT 인력 양성과 활용, 과학기술협력센터 등 협력 거점 구축, 신에너지, 원격교육·진료 등의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비핵화가 완성되어 '포괄적 협력 추진단계'에 접어들면 남북한 과학기술 격차 해소, 정보통신망 연결과 지식공유시스템 구축, 북한의 특화기술·산업 육성 등 대규모 협력 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
-- 북한의 과학기술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은.
▲ 발로 뛰어야 하는 연구다.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작은 자료라도 찾아야 한다. 북한이 접촉하는 나라는 안 가본 곳이 없다. 그중에서도 중국, 일본, 러시아는 안방 드나들 듯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중점적으로 펴던 시기에 그곳에서 10년을 살면서 사회주의 과학기술체계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중국과 북한이 비슷한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북한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북한의 과학기술 연구는 최소한 3년 이상은 해야 한다. 그 정도는 해야 자료가 축적되고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북한 연구는 조각 그림 맞추기와 비슷하다. 정보가 단편적으로 흘러나온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과학기술체계라는 밑그림을 연구한 덕에 북한에서 흘러나온 단편적인 정보라도 해석이 가능하게 됐다.
※ 이춘근(60)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에서 학사·석사·박사학위 과정을 마쳤으며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북한의 과학기술을 중점적으로 연구해오고 있다. 통일부 자문위원,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 민간위원, 통일준비위원회 경제분과 전문위원, 북한연구학회 부회장 등을 맡아 과학기술 분야의 남북교류와 협력에 앞장서고 있다.
sungo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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