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신선들이 놀고 가는 이유가 있었네

입력 2019-05-12 08:01  

[걷고 싶은 길] 신선들이 놀고 가는 이유가 있었네
문경 선유동천 나들길

(문경=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남쪽 바닷가 마을에서는 숨이 막히도록 화려한 꽃축제가 한창인 4월 초였다. 하지만 내륙 깊은 산골 마을에는 겨울이 미적거리고 있었다. 산머리에도, 그늘진 계곡에도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다.
풍경은 겨울의 흔적을 다 보내지 않았지만, 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맑디맑은 계곡물이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문경 선유동천 나들길은 문경 8경(景)에 꼽히는 선유동 계곡과 용추 계곡을 이어 걷는 길이다. 신선들이 놀던 곳이라는 선유동 계곡이 1코스, 신비로운 이야기가 깃든 용추 계곡이 2코스다.
두 코스 각각 4㎞ 남짓으로 가볍게 걷기 좋다. 이 길지 않은 계곡 길에서 신선들이 왜 자리 잡고 놀았는지, '옥같이 맑은 물'(玉溪水)이 뭔지 확인할 수 있다.

◇ 신비로운 전설 깃든 옥같이 맑은 계곡

길은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기념관에서 시작해 선유칠곡과 선유구곡을 거슬러 오르고 대야산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용추 계곡을 올라 월영대에서 돌아 나오는 코스다.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두 코스의 교차 지점인 대야산 주차장을 이용해도 된다. 이동 편의를 위해 이곳에서 2코스인 용추 계곡으로 먼저 향했다.
계곡에 머무르던 용이 하늘로 오를 때 그 발톱이 찍힌 듯 선명한 자국이 남은 용소(龍搔) 바위를 지나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꽃샘추위가 늑장을 부리던 때라 벌판에서는 바람이 제법 차고 거셌지만, 계곡에 들어서자 오히려 바람이 잦아들었다.
노란 생강나무 꽃이 봄의 전령으로 먼저 도착해 봄의 기운을 퍼뜨리고 있었다. 계곡물은 다가온 봄을 노래하듯 명랑하게 흘렀다. 물은 바닥의 모래알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투명했다.
조금 더 오르면 암수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용추(龍湫)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 가운데 난 깊은 웅덩이가 하트(♡) 모양인 데다, 전설을 증명하듯 승천하던 두 마리 용이 용틀임을 하면서 생겼다는 비늘 자국 흔적이 바위 양쪽에 있다.
하트 모양의 끝에서 하얗게 부서지며 흘러내린 물은 그 아래 웅덩이에 투명한 초록빛으로 모여 신비로움을 더한다.
가파른 바위 주변으로 안전 펜스와 밧줄, 구명 튜브가 얼기설기 시야를 가르지만, 여름철이면 물놀이객으로 성황을 이루고 인명 사고도 발생하는 곳이라 어쩔 수 없다.



◇ 계곡에 드리운 달빛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용추에서 오솔길을 더 오르면 회귀점인 월영대(月影臺)가 나온다. 밝은 달이 뜨면 맑은 계곡물에 드리우는 달빛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너른 바위를 따라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은 조금은 쓸쓸한 늦겨울 풍경 속에서도 그저 좋았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휘영청 달빛이 비치면 얼마나 더 좋을까, 꽃이 피고 신록이 가득하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절정을 누리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 절정을 상상하고 기다리는 설렘이 교차했다.
계곡을 건너 반대편 길로 내려오면 무당소를 만난다. 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소(沼)의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여 발이라도 담그고 싶지만, 수심이 무려 3m다.
100여년 전 물동이를 지고 가던 새댁이 빠져 죽고 그를 위로하는 굿을 하던 무당마저 빠져 죽어서 무당소라는 이름이 생겼다.




◇ 신선도 붙드는 절경

무당소를 지나 데크를 따라 걸으면 자연스레 선유동천 나들길 1코스의 선유구곡으로 이어진다.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유'(仙遊),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의 '동천'(洞天), 중국의 성리학자 주희가 푸젠성 무이산 계곡의 아홉 경치(무이구곡·武夷九曲)를 읊은 데서 유래한 '구곡'까지 다 가져다 붙인 건 좀 무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선유동 계곡에 들어서자마자 이내 수긍했다.
대야산 너머 괴산에도 선유동 계곡이 있는데, 문경 쪽이 더 길고 화려하다 한다.



용추 계곡을 나와 조선 후기 학자 도암 이재가 후학을 가르치던 자리에 세운 학천정에서부터 선유구곡이 역순으로 이어진다.
제9곡은 옥석대다. 옥으로 만든 신발이라는 뜻의 '옥석'은 '도를 깨우친 자가 남긴 유물'이라는 뜻이라 한다. 선인(仙人)들이 지향하는 도(道)가 존재하는 공간인 '극처'(極處)이자, 9곡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절경이다.
운동장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너른 바위와 그 위에 절편처럼 올라앉은 또 다른 바위,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 계곡 양옆으로 솟아오른 바위 절벽과 계곡을 굽어보는 소나무, 이제 막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오래된 꽃나무까지.
신선인들 놀다 가지 않을 수 없겠다, 하며 한낱 범인(凡人)도 바위 벌판에 잠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은 여전히 맑다 못해 투명해 물결의 그림자까지 보였다.



◇ 구곡(九曲)마다 숨은 글자 찾기

학천정 뒤편 바위의 '산고수장'(山高水長), 맞은편 바위의 '선유동', 커다란 절편 같은 바위 옆면에 전서체로 새겨진 '옥석대' 등 각자(刻字)가 곳곳에 남아 있다.
'선유동'은 이곳을 극찬했던 최치원의 글씨라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물소리가 생황 소리와 같다는 뜻의 제8곡 난생뢰를 지나 영귀암, 탁청대, 관란담, 세심대, 활청담, 영사석, 옥하대까지 구곡마다 외재 정태진(1876∼1956)이 남긴 시가 있다.
선유구곡의 이름을 비롯해 사람 이름 등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여럿이라 예술 작품 같은, 혹은 숨어있거나 흐릿해진 각자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다.
너른 바위에 깊지 않은 맑은 물이 흐르는 선유동 계곡은 문경의 대표적인 피서지이기도 하다. 이곳저곳이 모두 우열을 가릴 것도 없이 자리 펴고 눕고 싶고, 발 담그고 싶은 명당이다.
선유구곡은 바로 선유칠곡으로 이어진다. 대한제국 말의 혼란기, 호에 우(愚)자가 들어가는 일곱명의 친구들이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일곱 굽이의 절경에 이름을 지은 곳으로 칠우칠절(七愚七絶)이라고도 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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