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숙 원광대 연구위원, 목간학회 발표회서 주장
최연식 "광개토왕비, 신묘년조 기사 숨은 주인공은 반파"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터에서 나왔거나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 조각 5개가 신라 신문왕릉비라는 주장이 나왔다.
신라 능묘비는 무열왕릉비, 문무왕릉비, 무열왕 차남인 김인문비, 성덕왕릉비, 흥덕왕릉비가 조각 형태로 현존하며, 신문왕릉비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서예사 연구자인 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목간학회와 공주대 박물관이 오는 20일 공주대에서 여는 정기발표회에서 사천왕사 출토 비석 조각의 서풍, 필법, 각법을 분석해 신문왕릉비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16일 배포된 발제문에 따르면 정 위원은 1976년 당간지주 동쪽에서 나온 '차임진'(次壬辰) 명 비석과 2012년 서석교 부근에서 찾은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 명 비석 2편,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소장품인 '명왈'(銘曰) 명 비석,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장'(장<金+將>) 명 비석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먼저 비석 건립 시기를 알려주는 간지인 '임진'(壬辰)에 주목했다. 신라 제31대 임금인 신문왕은 681년 즉위해 692년에 세상을 떠났다. 692년은 임진년이다.
정 위원은 신문왕 아들 성덕왕(재위 702∼737)이 황복사 삼층석탑에 부친, 형인 효소왕, 모친 신목왕후의 명복을 빌며 넣은 사리함 명문에도 '임진'이라는 말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신목왕후가 섭정 기간인 692∼699년에 신문왕릉비를 세웠을 텐데, 이는 695년 이후 건립한 김인문비와 비슷한 시기에 해당한다"며 "글자는 정사각형 해서(정자체)로 가늘면서 힘찬데, 이러한 글씨는 능묘비 특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무궁기덕십야' 명 비석에 대해서는 "글자 크기가 '임진' 명 비석과 거의 같다"면서 '무궁기덕십야' 명 비석과 '임진' 명 비석에 모두 나오는 '진'(震) 자를 비교하면 필법과 각법이 거의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무궁하며, 그 덕은 열 가지다'로 해석되는 첫 행이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함 명문 2∼3행 '신문대왕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린다'와 내용이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문무왕릉비로 알려진 '명왈' 명 비석과 '장' 비석도 필법이나 각법을 분석하면 '임진' 명 비석, '무궁기덕십야' 명 비석과 일체였음을 알 수 있다고 역설했다.
정 위원은 "비석 조각 5개는 정연한 구양순풍 해서로, 같은 방법으로 쓰고 새겼다"며 "신문왕릉비는 신라 중대 능묘비의 맥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그 존재 가치가 상당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목간학회 발표회에서는 사천왕사터 비석 외에도 그간 논쟁이 이어진 유물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가 공개된다.
최연식 동국대 교수는 한국과 일본 학계가 해석을 두고 대립한 고구려 광개토왕비 기록 '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신라이위신민'(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의 의미에 대한 독특한 접근법을 제시한다.
이른바 신묘년(391)조 기사로 불리는 이 문구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되면서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됐다.
이에 대해 국내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침공해)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깨뜨렸다. 백제는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로 이해하자는 견해를 나타냈으나, 문법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최 교수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한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백제가 목적어가 아닌 주어가 돼야 하고, 이럴 경우 '백잔'(百殘, 백제)은 파(破, 깨뜨리다)의 목적어로 볼 수 없다"며 "'백잔'이 '파'의 목적어가 아니라면, □파는 명사·수동·피동·동명사가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래도'(來渡)의 다음에 장소가 온다는 것을 고려하면 □파는 지명일 가능성이 크다"며 "'파' 음이 들어가는 고대 지명으로는 '반파'가 있는데, '파' 앞글자를 '반'으로 읽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최 교수는 '□파'가 본인 예상대로 반파라면 신묘년조 기사는 "왜가 신묘년에 반파로 건너오자, 백제는 신라를 (공격해)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된다면서 "반파는 남해안 지역에 있었고, 신라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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