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위한 영상 설명…영화 이어 오페라·연극으로 확대
"장애인·노인 불편없는 '배리어프리'도시 만드는 게 최종목표"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영화나 TV를 보는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지점에서 울고 웃으면서 내용을 이해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시각장애인을 위해 영상물 속 장면을 말로 설명하는 '화면해설'을 주제로 국내 첫 박사학위 논문을 쓴 김정희 부산평화방송팀장과 두 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오숙희 배리어프리영상포럼 부회장은 '화면해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올해 장애인을 날(20일)을 사흘 앞둔 17일 연합뉴스는 화면해설 분야 국내 1, 2호 박사인 두 사람을 함께 만나 국내 화면해설의 현실과 발전 방향 등을 물었다.
◇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주는 화면해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꽃을 사는 장면이 나오고 "얼마에요"라고 대사를 말하는 장면이 있다면 시각장애인에게는 "얼마에요"라는 대사밖에 들리지 않는다.
주인공이 어떤 상점을 갔는지, 표정은 어떤지, 화면으로 접하는 정보와 묘사된 상황들을 시각장애인은 알 수 없다.
특히 해당 장면이 주인공이 운명의 상대를 처음 만나는 것이고, 표정으로 심리상태를 드러냈다면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큰 줄거리를 놓친 것이다.
이렇게 시각장애인이 겪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 화면해설 작가들 역할이다.
이들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 대사와 대사 사이 음성이 비는 공백을 찾아 영상의 내용을 말로 설명한다.
국내에서는 2011년 방송법 개정 이후 장애인 방송 편성 비율이 명시됐고, 2016년부터 지상파 TV 기준으로 방영 프로그램의 10% 이상을 '화면해설'로 제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비장애인의 경우 모르고 지나쳤겠지만, TV 리모컨에서 설정 버튼을 누르면 '화면해설'이 나온다.
일부 리모컨의 경우 화면해설 버튼이 아예 별도로 마련돼 있기도 하다.
◇ 무대 해설로 첫 오페라, 연극 감상 시각장애인 '감동'
화면해설 분야 2호 박사학위를 받은 오 부회장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 생활을 한 베테랑 작가다.
그는 2012년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화면해설 대본을 써달라는 제안을 처음 받으며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오 부회장은 "첫 일을 맡은 뒤로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의뢰가 조금씩 들어왔다"면서 "화면해설을 2년 정도 했을 때 이 일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기본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구나'라는 생각했고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오 부회장은 국내에서 연구 기반이 부족한 화면해설 분야를 스스로 힘으로 어렵게 배우고 익혀갔다.
화면해설 분야는 대학에 따로 학과가 없어 유사한 전공인 문예창작학과에서 2012년 박사과정을 밟으며 화면해설 분야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렇게 5년간의 자료 수집과 연구 끝에 2017년 박사학위 논문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 대본 창작 연구'를 펴냈다.
이 논문은 영화와 방송뿐 아니라 연극, 오페라 등 무대 해설을 포함한 매체 별 해설 대본 창작방법을 연구했다.
오 부회장은 2016년 오페라 분야의 무대 해설에도 처음 도전했다.
어둠 속의 오페라 '라 보엠'을 영화의 전당에서 선보였다.
기존의 '라 보엠'을 해체한 뒤 재구성해 무대 해설을 넣는 형식이다.
또 부산국제연극제 상연작인 무언극 '안네의 일기'에서도 대사와 무대 해설을 제공해 시각장애인들이 오페라와 연극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당시 관람객으로 온 40대 시각장애인이 '내 인생에서 첫 연극 공연'이라며 감동하는 모습을 보고 큰 보람을 느꼈다"고 전했다.
◇ 표준화된 제작 지침 없어 '질'은 제각각
박사 논문 1호인 김정희 팀장은 1994년부터 방송작가 일을 해오던 중 2011년 처음으로 화면해설 분야를 접했다.
글쓰기를 평생 업으로 삼아왔지만, 처음 경험한 화면해설 분야는 만만치 않았다.
김 팀장은 "배우들 대사 사이의 공백 시간을 어떻게 측정해야 할지, 간결하고 압축되면서도 상상 가능한 언어로 어떻게 묘사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100분짜리 영화 한 편을 해설하기 위해 같은 영화를 10회 이상 봐야 하는 경우도 있어 웬만한 경력 작가도 쉽게 생각하고 손을 댔다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가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글 쓰는 난이도에 비교해 임금 등 처우는 열악했다.
화면 해설된 결과물을 기준으로 영화 1분당 5천원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화면해설 분야 종사자 중 많은 사람은 이를 직업보다는 '재능 기부' 정도로 생각한다.
김 팀장은 "화면해설에 대해 표준화된 제작 지침이 없다 보니 쓰는 사람에 따라 질이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화면해설은 오히려 감상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2011년 처음 작업 당시 우리나라에 '제작 지침'과 관련한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이어 "막막했지만, 누군가는 시도해야 할 일이었다"면서 "'일단 두들겨 맞자'는 심정으로 꾸준하게 화면해설 교재 작업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2013년 말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 '화면해설 교재'(2014) 작업에 참여했고, 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론(2015), 배리어프리 화면해설 글쓰기(2017) 저자로 참여하면서 화면해설에 관한 제작 원칙을 세워나갔다.
김 팀장은 2017년 '화면해설제작 지침 설정'과 관련한 내용으로 국내 첫 박사학위 논문을 펴냈다.
이듬해에는 방송문화진흥회 저술지원으로 '배리어프리 영상제작론'도 발간했다.
◇ '배리어프리' 도시 꿈꾼다
두 사람은 향후 목표가 '화면해설 분야의 발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오 부회장은 "영화, TV를 넘어서 뮤지컬·오페라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까지 접합한 화면해설이 되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올해 화면해설 창작자 위주의 협동조합을 만들고 부산에서 배리어프리 콘텐츠 제작과 관련한 사업을 지속해서 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종목표는 도시 전체를 '배리어프리'로 만들어 노인이나 장애인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팀장은 "온·오프라인에서 화면해설을 비롯한 배리어프리를 접할 기회를 확산해야 한다"면서 "방송사에서 배리어프리 영화를 자체 제작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부산평화방송은 2016년부터 매년 배리어프리 영화콘서트를 기획해 방송하는 등 배리어프리 확산을 위한 작은 날갯짓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행히 최근 5년 동안 화면해설 제작량은 확산추세를 보이는 데 이제는 질적인 부분을 다듬어 나가야 할 때"라면서 "영국의 경우 2000년대 초반부터 화면해설 방송제작 지침을 마련해 표준화되고 질 높은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어 우리도 이를 벤치마킹해 우리 현실에 맞는 표준화된 제작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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