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출신 원광조 교무 한겨레중고에서 탈북 학생 지도
"남북관계가 잘 풀려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안성=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새터민 자녀들의 배움터인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의 한겨레중고등학교에는 쪽머리에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은 한 여성이 눈에 띈다. 북한 여성이 아니라 원불교의 교무(敎務)다.
원불교 여성 성직자들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고 서원(誓願)하는 것이 전통이어서 정녀(貞女)라고 부른다. 한복 맵시가 고와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매가 그윽하고 콧날이 시원한 서구적 외모를 지니고 있다. 원불교의 유일한 외국인 정녀인 인도 출신의 원광조(본명 타시돌마·44) 교무다.
"옷차림 때문에 오해를 살 때가 가끔 있어요. 대부분은 원불교 정녀의 정복(正服)인 걸 알지만 모르는 분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봅니다. 제가 외국인인 걸 알고는 더욱 의아하게 여기죠. 2005년 금강산에 갔을 때는 제가 북한 사람인 줄 아는 관광객도 있더군요. 학생들과 편하게 어울리려고 평상복을 자주 입는데 법회를 이끌거나 손님을 만날 때는 꼭 치마저고리를 입죠."
17일 한겨레중고 원불교 교당에서 인터뷰에 응한 원광조 교무는 인도 최북단 잠무 카슈미르주의 라다크에서 8남매(3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장래 희망은 경찰이나 군인이었다. 2년제 예비대학에 다닐 때 경찰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목표를 바꿔 언니나 오빠를 따라 의대 입학을 준비하던 중 한국의 원불교 관계자들을 만나게 됐다. 당시 서울 강남교당의 박청수 교무가 라다크에 카루나 자선병원을 짓고 있었는데, 그를 만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부모님은 교육열이 높았어요. 시집가서 당당하게 살려면 여자는 남자보다 더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위의 오빠가 저보다 먼저 전북 익산의 원광대에 유학하고 있었죠. 대만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려다가 원광대에도 한의대가 있다는 오빠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중 박 교무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교무님의 왕성한 활동력과 헌신적인 모습에 반해 1997년 7월 7일 한국으로 건너왔죠."
강남교당에서 원불교 기초교리를 공부하며 이화여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강남교당 교도들은 인도의 젊은 여성이 이국땅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정성껏 도왔다. 특히 그의 은부모(恩父母)가 된 교도 부부는 학비와 생활비를 대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원 교무는 원불교로 출가해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은혜를 갚기로 결심했다. 남녀 성직자 간에 평등한 원불교의 풍토에도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원광대 원불교학과와 원불교대학원대를 졸업하고 2004년 원불교 교무 자격을 얻었다. 박청수 교무는 그에게 '빛을 세상에 널리 비추라'는 뜻으로 '광조'(光照)란 법명을 지어주었다. 원불교의 '원'(圓) 자를 성으로 삼아 법명이 곧 한국식 이름이 됐다.
그를 한국으로 이끈 오빠 아지타(원현장)도 교무가 돼 인도 델리교당과 미국 하와이교당을 거쳐 현재 익산의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교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여성과 달리 원불교 남성 성직자는 결혼을 선택할 수 있다. 오빠는 정남(貞男)의 길을 걷지 않고 결혼했다.
그가 강남교당에서 교무 일을 시작할 무렵 정부는 탈북 청소년을 위한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안병영 당시 교육부 장관이 박청수 교무에게 부탁해 원불교 학교법인 전인학원이 설립과 운영을 맡았다고 한다. 원 교무는 박 교무를 도와 개교 준비작업에 매달렸고, 2006년 특성화학교 인가를 받아 문을 열면서 이곳에 부임했다. 기숙사 사감을 겸하며 기초영어, 명상, 요가 등을 가르치기도 했고 지금은 학교 교당 운영, 학생 상담, 동아리 '마음소리' 지도 등을 맡고 있다.
"현재 재학생은 모두 160명인데 모두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습니다. 남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거나 대화를 끊고 사는 아이도 있죠. 어떻게 상처를 치유해야 할지 몰라 제가 답답해하는 것을 보고 누가 '직접 공부해서 치유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대구사이버대 미술치료학과에서 공부했죠."
재학생 가운데 상당수는 중국 등 제3국에서 태어났는데, 부모 중 한쪽이 외국인이면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한다. 학교에 국어 교사는 있어도 한국어를 처음부터 가르칠 선생님은 없어 원 교무는 원광디지털대 한국어문화학과도 졸업해 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탈북과 한국 입국 과정에서 개신교 단체들이 도움을 많이 주다 보니 재학생 대부분은 개신교 신도다. 원불교는 개종을 강요하지 않지만 원 교무에게서 명상 지도를 받고 원불교에 입문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졸업한 뒤 직장을 얻어 저를 찾아오면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미국과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친구들도 있고, 결혼해 잘사는 친구도 있죠. 소중한 인연과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원 교무는 지난해 7월 숙원 사업 하나를 이뤘다. 한겨레중고 재학생은 전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데, 부모 중 한쪽이나 양쪽 모두 없는 학생이 많아 주말이나 명절에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한다. 졸업생들도 내 집처럼 모여 지낼 곳이 필요했다. 원 교무의 호소를 받아들여 범종교인 공익단체 한울안운동과 원불교여성회가 지난해 7월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그룹홈 '한울안 한겨레의 집'을 마련했다. 운영은 한겨레중고가 맡는다.
원 교무는 "주말마다 한겨레의 집에 가야 하니 일은 더 늘어났다"고 짐짓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재학생·졸업생과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어 행복하다"며 웃는다.
"원광대 신입생 면접 때 '원불교 교무가 되면 무슨 일을 해보고 싶은가'란 질문을 받고 별생각 없이 '북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는데 말이 씨가 됐네요. 학생들의 부모는 한국을 택해 온 것이긴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한국에 함께 온 아빠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북한에 계신 아이도 있어요. 남북관계가 잘 풀려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원 교무는 처음에 한국어가 따로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한국에 관해 무지했다고 한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옆에 탄 한국인 승객에게 '반갑습니다'와 '고맙습니다' 두 마디만 배웠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써야 할지 헷갈려 실수한 적도 많았다.
불교 집안에서 자랐는데, 그곳에서는 승속(僧俗)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법당의 스님 출입문이 따로 있고 법당 한복판은 어간(御間)이라고 해서 신도가 앉지 못하게 한다. 어느 절에 들러 법당 어간에 놓인 좌복(坐服·참선할 때 앉는 방석)에 앉아 목탁을 치다가 주지 스님에게 혼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보니 혼란을 많이 겪었죠. 지금도 외국인이어서 불편한 점이 있어요. 인터넷 이용도 까다롭고요. 제가 이 학교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는데도 한국인 선생님부터 찾을 때가 많죠.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차별이 줄었으면 좋겠어요."
오는 4월 28일은 1916년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원불교를 창교한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이다. 전국의 교당은 물론 한겨레중고에서도 기념행사를 펼친다. 올해 대각개교절은 일요일이어서 한겨레중고는 25일 은혜 잔치를 열어 이웃과 음식을 나눈다고 한다.
"대종사님 말씀 가운데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란 말을 가장 좋아합니다. '곳곳에 부처님이 계시고 하는 일마다 불공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죠. 제 좌우명이기도 하고 교도나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류는 알게 모르게 서로 은혜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남의 도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죠. 은혜에 감사하고 서로를 배려하면 세상이 더욱 밝고 맑고 훈훈해질 겁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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