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3가 오비베어 'SINCE 1980' 간판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입력 2019-04-29 07:00  

을지로3가 오비베어 'SINCE 1980' 간판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노가리골목 '터줏대감'…지난해부터 건물주와 명도소송 중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서울 을지로3가는 간판, 조명, 페인트, 도기 등 각종 소상공업체들이 밀집한 곳이다.
가게들이 문을 닫는 저녁이면 사방이 깜깜해지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을 밝히는 곳이 노가리 호프 골목이다.
이 골목에서 업력이 가장 길어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을지OB베어' 사장 강호신(59) 씨는 지난 26일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강씨는 "건물 임대계약 연장을 놓고 현재 건물주와 1심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2013년 5년 재계약해 계약 만료가 지난해 10월이었는데 연장이 일단 불발됐다고 했다.
을지OB베어는 1980년 강씨의 아버지 강효근(92) 씨가 이곳에 문을 열었다. OB맥주의 전신인 동양맥주가 모집한 프랜차이즈의 1호점이다.
딸 강씨는 "지금도 아버지가 가게로 전화해서 일에 관여하신다"며 "사정을 전부는 말씀 못 드렸지만, 아버지가 계시니까 저는 이 가게를 지켜야 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39년간 여기서 장사해서 건물의 가치를 올렸고 이 골목을 만들었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잘 알려졌다시피 을지OB베어는 '노가리 1마리 1천원'으로 상징되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첫 가게다. 을지OB베어 아니었더라면 한여름 밤 노천에서 노가리를 찢으며 생맥주를 들이키는 이 골목의 모습 역시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가리 1천원은 이문이 맞지 않는다. 노가리 원가가 1천원을 넘긴 지 오래다. 거기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연탄불에 맨손으로 구워내는 인건비까지 고려하면 노가리는 파는 족족 적자다.


강씨는 "노가리는 서비스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 정말 마이너스"라며 "특제 소스도 39년 전 아버지가 만드신 그대로 만든다. 그 레시피는 남편도 모르고 아들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다. 저와 아버지만 안다"고 말하며 웃었다.
을지OB베어는 창업주 강씨의 독특한 경영관을 토대로 주변 상인들과 함께 성장했다.
딸은 "아버지는 가게 문을 밤 10시에 닫으셨다. 술집에 밤 10시가 어떤 시간인가. 그야말로 피크 중 피크인데 그때 문을 닫은 것"이라며 "여쭤보니 작게라도 음주문화를 바꾸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 전했다.
을지OB베어의 초창기 주 고객은 주변 인쇄소 등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더러 한 잔 덜 마시고 그 돈으로 과일이라도 사 들고 조금이나마 일찍 집에 가서 가족들 얼굴을 보라는 것이 창업주 강씨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딸이 가게 운영에 나선 뒤로는 마감을 오후 11시로 1시간 늦췄다. 그렇다 해도 취객들의 흥이 한창 올랐을 무렵 영업을 마치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닐 터다.
강씨는 "제가 '저희 마감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손님들이 계산하려고 카운터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아버지의 전통이나 저희 집의 문화를 대부분 알고 오셔서 그런지 일찍 문을 닫는다고 싫은 소리 하시는 분들이 전혀 없다"라며 웃었다.
그는 "아버지가 욕심 없이 운영하신 것이 39년을 이어온 원동력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을지OB베어가 언제까지 이 자리를 지킬지는 알 수 없다. 건물주의 권리 주장에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유명하고 오래된 곳이라는 이유로 개인 간 다툼에 공공기관 등이 선뜻 개입하기도 쉽지 않다.
강씨는 "명도소송이라는 것이 세입자가 이기기는 어렵다"고 한숨 쉬었다.
그는 "소식이 퍼지고 나서 요즘 더 많은 분이 오신다. 긴말 안 하시고 '화이팅' 해주고 가시는 분들이 많다"며 미소를 지었다.
강씨는 이날 인터뷰를 마치고 가게 옆에 걸려 있는 소형 간판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창업 때부터 있던 것인데 매일 영업이 끝나면 걷어서 실내로 모셔둔다고 했다.
강씨는 "이곳은 단순한 술집이 아닌, 스토리가 있는 문화공간"이라고 말했다.


j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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