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이면서도 환상 자극하는 작업으로 차세대 작가 선두
대림미술관 140여점 전시…"공감 끌어낼 이야기 없다면 예쁜 오브제일뿐"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사람 크기만 한 킹, 퀸, 나이트, 비숍 등이 흑백 체스판에서 자리를 지킨다. 원숭이가 받쳐 든 테이블 위에서는 바나나가 오르락내리락한다. 황금 마스크는 아프리카 고대왕국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26일 찾은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은 '환상극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45)이 마술을 부린 덕분이다. 대림미술관에서 개막한 '하이메 아욘, 숨겨진 일곱 가지 사연'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한 아욘의 주요 작업을 소개하는 전시다.
마드리드와 파리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아욘은 2001년 스튜디오를 설립한 뒤 종횡무진하는 중이다. 디자인, 가구, 회화, 조각, 스케치 등 140여점을 망라한 대림미술관 전시는 아욘이 월페이퍼, 엘르, 타임 등 세계에서 권위 있는 매체들로부터 가장 창의력이 뛰어난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유를 보여준다.
열대 과일에서 출발한 크리스털-색유리 화병 '크리스털 캔디 세트'나 아프리카 장식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유리 화병 '아프리칸도' 등은 독특한 아름다움과 예술성을 뽐낸다. 작가는 프랑스 바카라, 이탈리아 나손 모레티 등 전통 브랜드 장인들과 손잡고 실험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했다. 아욘 작업이 자유분방하면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내가 가장 중시하는 두 가지는 품질과 경쾌함"이라면서 "좋은 재료를 활용하고, 완벽함을 기한다"라고 밝혔다.
1805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한 트라팔가르 해전을 모티브로 한 체스게임 설치 작업 '토너먼트'(2009)는 도전 정신을 보여준다.
작가는 2m 높이 체스 말 32점을 만들고, 각 말에다 런던을 대표하는 건물을 담았다. 이 역시 이탈리아 세라믹 브랜드 보사의 장인들과 협력한 것이다. 자국에 민감할 수 있는 역사를 작품화한 시도 자체도 흥미롭다.
작가는 "작품마다 고유 이야기가 중요한 법"이라면서 "이야기가 없다면 그저 예쁜 오브제일 뿐 공감을 끌어낼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감성을 자극하는 아욘 예술은 4층에 설치된 '아욘 그림자 극장'에서 절정에 달한다. 전시장을 거니는 관람객은 상상 속 캐릭터들이 빛과 그림자를 만나 만들어낸 판타지에 매혹된다.
작가는 이러한 창의성의 원천으로 '자유로움'을 꼽았다. "제 뇌가 8살 뇌와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만큼 아이처럼 재미를, 또 자유를 추구합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저는 '제로'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전시는 11월 17일까지. 관람료는 1만 원.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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