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서 현대미술과 조화 시도한 특별전
"과거와 현재 잇는 공간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길"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평소에도 어두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이 칠흑같이 까맣다. 아주 희미한 불빛을 따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니 자그마한 석상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벽면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기묘한 풍경을 바라본다. 고요함 때문일까.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기분 좋은 평온함이 밀려온다. 그때 배기동 중앙박물관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뜻이 있는 미소 같지 않나요. 큰 불상보다 편안하고 예쁘잖아요. 많은 사람이 여기에서 번뇌를 끊고 마음속을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배 관장이 극찬한 유물은 영월 창령사터 출토 나한상. 은은한 미소와 정감 어린 표정으로 강원도 대표 문화재로 자리매김한 이 나한상들이 단체로 서울 나들이를 했다.
중앙박물관은 지난해 국립춘천박물관에서 특별전을 통해 선보인 창령사터 나한상 88점을 모셔와 꾸민 전시 '영월 창령사터 오백나한 -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을 29일 개막했다.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인 나한(羅漢)은 석가모니 제자이자 깨달음을 얻은 불교 성자다. 신통력을 지닌 나한은 불법을 수호해 중생이 복을 누리도록 돕는 존재여서 한반도에서는 나한 신앙이 널리 유행했다. 신앙 대상은 부처 10대 제자를 비롯해 십육나한, 십팔나한, 오백나한으로 다양하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창원리 창령사터에서 나온 오백나한은 2001년 주민이 신고하면서 존재가 알려졌고, 강원문화재연구소가 이듬해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해 형태가 완전한 상 64점을 포함해 나한상과 보살상 317점을 찾았다.
아울러 '창령사'(蒼嶺寺)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를 발견하면서 사찰 이름을 확인했고, 송나라 동전 숭녕중보(崇寧重寶)와 고려청자를 통해 창건 시기가 고려시대임이 드러났다.
창령사는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명맥을 잇다가 이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는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제작한 나한상도 이 무렵 인위적으로 훼손됐다고 본다.
박경은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창령사터 오백나한은 머리 위까지 가사를 쓰거나 두건을 착용한 형태가 많다"며 "고요히 선정(禪定)에 들어 구도(求道)의 길을 걸은 나한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국립춘천박물관처럼 문화재와 현대미술의 결합을 시도했다. 설치작가 김승영이 참여했고, 유물에 대한 별다른 설명도 없다.
기다란 전시장은 크게 제1부 '성속(聖俗)을 넘나드는 나한의 얼굴들'과 제2부 '일상 속 성찰의 나한'으로 나뉜다.
앞쪽 제1부는 바닥을 벽돌로 빼곡하게 채우고, 그 위에 사각형 좌대를 둔 뒤 높이 40㎝ 안팎의 나한상들을 배치했다. 조명을 받은 나한상은 저마다 표정이 다른데, 시골 동네를 지키는 장승처럼 푸근하다.
특이하게 '당신 마음속의 나한을 보세요'라는 문구를 적은 빈 좌대도 있다. 나한상이 왜 없는지 궁금해 아래를 내려다보면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제2부 풍광은 압도적이다. 스피커 700여 개를 도심 빌딩 숲처럼 둥글게 쌓고, 중간중간에 나한상을 뒀다. 한가운데에 들어가 고개를 들면 탄성이 나온다.
두 공간 세부 주제는 다르지만, 전시장 전체에서 '자아 성찰'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주려 했다고 박물관은 설명했다.
김승영 작가는 "오백나한의 수많은 표정을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사색의 공간에서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잠시나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배 관장은 "문화유산이 오래되고 쓸모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속에 담긴 무궁무진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며 "삶에 지친 사람들이 나한처럼 현실을 뛰어넘는 용기를 갖고 살아가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특별전 기간에 아트 토크, 소원책 만들기, 힐링 요가 같은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전시는 6월 13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3천원, 학생 2천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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