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한 김규식(1881.1~1950.12)·김순애(1889.5~1976.5) 부부 독립지사를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김규식 선생은 1897년 미국 유학을 떠나 로어노크대를 거쳐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04년 귀국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여러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고, 1913년 1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됐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그해 5월 12일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1921년 임시정부 내에 독립운동 노선으로 갈등이 불거지자 잠시 임시정부를 떠났다가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으로 선임됐다.
이어 1933년 1월 미국을 방문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 달러를 모금해 돌아왔으며,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됐고 1944년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이 중심이 됐다.
선생은 1950년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해 12월 10일 평북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1919년 김규식 선생과 결혼한 부인 김순애 선생은 1919년 7월 동지들과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처하자 1926년 7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해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 활동을 펼쳤다. 간호사양성소를 설립해 다수의 간호사를 양성 배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0년 8월 상하이에서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해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했다.
1945년 11월 고국으로 돌아와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 교육에 공헌했다. 1976년 5월 8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정부는 1989년 김규식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김순애 선생에게 1977년 독립장을 각각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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